samedi 9 juin 2007

뛰일르리 습격 (1792년 6월 20일)

탈출에 실패한 루이 16세는 이제 완전히 포로의 신분이 되어 국회가 정하는 법령들에 고분고분 서명을 하여, 마침내 1791년 9월 14일 헌법 (constitution) 이 완성됩니다. 그리하여 1789년 6월 20일 베르싸이으의 손바닥 놀이장에서 했던 맹세, 즉 어떤 상황, 어떤 장소, 어떤 압력 하에서라도 헤어지지 않고 프랑쓰에 헌법을 만들겠다는 약속이 지켜졌습니다. 그동안 국회의 명칭은 Assemblée nationale constituante (입헌국회) 였는데, 이제 입헌 (constituer) 이 끝났으므로 이 모임은 해체됩니다. 대신 새로 뽑힌 의원들이 Assemblée législative (입법의회) 라는 새로운 이름의 국회를 구성합니다 (1791년 10월 1일).

이들은 빠리의 뛰일르리 궁 (Palais des Tuileries) 옆에 있던, 현재는 사라진 마네쥬 (Manège) 라는 건물에서 모였는데, 애초에 왕의 승마연습장 (= manège) 이었던 이 건물은 좁고 긴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의원들이 연설자의 목소리를 잘 듣기 위해서는 그를 가운데에 두고 양 옆으로 갈라 앉아야 했습니다. 그전에는 비교적 아무렇게나 앉았던 사람들이 왕의 탈출 사건 후로는 두 파로 팽팽하게 나뉘어져, 왕을 폐위시키고 공화국을 세우자는 극단파들은 연설자의 왼쪽에, 입헌왕정을 유지하자는 온건파들은 연설자의 오른쪽에 앉음으로써, 오늘날까지도 자주 쓰이는 좌파/우파 (gauche/droite) 라는 표현이 생겼습니다. 영국의 House of Commons 나 House of Lords 가 모이는 방들을 보면 현재도 여전히 이러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데, 정작 앉는 자리는 정치적 성향과 관련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프랑쓰의 국회는 이제는 반원형의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앉는 자리는 가장 왼쪽에 극좌파가 앉고, 오른쪽으로 갈수록 좌, 중앙, 우, 극우의 순으로 앉습니다. (물론 극좌파와 극우파는 앉는 기회가 드물지만.)

왕가의 탈출 사건 이후 큰 목소리를 얻은 공화정파들은 이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왕을 폐위시킬 결심을 하고, 왕이 실수를 저지르도록 여러번 선동시켰지만, 왕은 번번이 미끼를 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1792년 6월 11일, 왕은 두 개의 법령에 대해 거부권 (veto) 을 행사합니다. 하나는 5월 27일의 법령으로, 혁명에 찬성한다는 선서를 하지 않은 모든 신부들을 강제수용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6월 8일의 법령으로, 빠리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이만 명으로 구성된 새로운 군대를 창설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첫번째에 대한 거부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루이 16세의 개인 신념에 크게 반대되기 때문이었고, 두번째에 대한 거부는 빠리 시민을 보호한다는 것은 핑계일 뿐, 실제 이유는 더욱 조직적인 폭동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당시 내부무 장관이었던 롤렁 (Jean-Marie Roland de la Platière) 이 매우 건방진 태도로 왕에게 당장 거부권을 취소하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동안 온순하게 참아왔던 왕 역시 « 폭발 » 하여, 롤렁을 비롯하여 모든 장관들을 해고시켰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빠리 시민들은 매우 분개하여 6월 20일, 창과 도끼를 들고 뛰일르리 궁을 습격합니다. 이들은 닥치는 대로 도끼질을 하여 궁 안을 때려 부수고, 심지어 대포까지 끌고와 왕의 방문 앞에 장전시켜 놓고, 왕에게 거부권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왕은 폭도들을 침착하게 맞이했고, 창과 칼의 위협 속에서도 거부권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단호함과 위엄있는 태도에 한풀 죽은 폭도들은 더이상 강요하지 못하고 물러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물러가기 전에 이들은 왕비와 도팡 역시 해치려는 시도를 했지요. 하지만 왕비 역시 속으로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겉으로는 초연하고 품위있는 태도를 지킴으로써 폭도들의 기를 다시 한번 꺾었습니다. 이날 결국 시민들이 얻은 승리라면, 왕과 도팡의 머리에 프리지의 모자를 씌운 것 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사건은 당시에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시위인 것처럼 선전되었지만, 사실은 극단적 공화정파들에 의해 미리부터 치밀하게 준비된 폭동이었습니다. 뛰일르리 습격이 6월 20일날 일어난 것 역시 우연히 아니죠. 이 날은 손바닥 놀이장 맹세의 3주년 기념일일 뿐, 아니라 왕의 탈출 시도 1주년이 되는 날이니까요. 창과 도끼 역시 이 날짜에 맞춰 일부러 대량 제조되어 시민들에게 배포되었고, 몇몇 훈련된 조직자들이 정해진 명령에 따라 시민들을 이끌었습니다. 조직자들의 목적이 정확히 왕과 왕비를 죽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흥분된 분위기 속에 사고처럼 위장하여 그들을 살해할 수 있었다면 더욱 좋은 일이었고, 아니면 최소한 분명하게 겁을 주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거부권을 취소시킴으로써 더이상 왕은 아무런 권리가 없는 사람이고, 이제 프랑쓰는 시민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점을 뚜렷이 상기시키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날 폭동의 목적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공화정파들은 더욱더 극단적으로 왕의 폐위에 열성을 올리게 되고, 빠리의 정치와 사회 분위기는 갈수록 과격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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