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11 juin 2007

페르쎈의 피살 (1810년 6월 20일)

1792년 6월 20일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뛰일르리는 다시 한번 폭도들의 습격을 받습니다 (1792년 8월 10일). 이 습격은 훨씬 대규모였고, 훨씬 잔인했고, 훨씬 결정적이었지요. 왕가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국회의 보호를 요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8월 10일의 폭동은 사흘간 계속되었으며, 뛰일르리를 피바다로 만들어 놓고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지요. 무더운 팔월의 삼일 동안 왕가는 국회가 내 준 마네쥬 내의 작은 사무실 - 천정이 너무 낮아서 똑바로 설 수 조차 없는 방에 숨어 지냄으로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왕정의 공식적인 폐지는 약 한 달 뒤, 9월 21일 선포되지만, 실질적으로 왕은 국민이 뽑은 대표자들 앞에 목숨을 구해달라고 빎으로서 상징적으로 그의 모든 권리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흔히 프랑쓰 역사에서 8월 10일은 왕정이 추락한 날로 언급됩니다.

이후, 왕가는 떵쁠 (Temple) 에 감금되고, 여기서 지내다가 왕은 사형에 처해집니다 (1793년 1월 21일). 왕비는 아이들과 헤어져 꽁씨에르쥬리 (Conciergerie) 에 분리 수용되고, 거기서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1793년 10월 16일). 왕의 여동생 엘리자벳 (Elisabeth) 은 떵쁠에 남아있었지만, 1794년 5월 10일, 역시 단두대에 목이 잘리고, 도팡 루이 (Louis) 는 수많은 학대를 받은 끝에, 열살의 나이에 병으로 죽습니다 (1795년 6월 8일). 도팡의 누나였던 마리-떼레즈 (Marie-Thérèse) 만이 살아 남아 외스터라이히 제국이 체포하고 있던 프랑쓰 포로들과 교환됩니다 (1795년 12월 18일).

이 모든 사건들을 멀리서 전해 들으면서, 페르쎈의 마음은 괴롭기가 말할 수 없었죠. 왕비가 살아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왕비를 탈출시킬 새로운 계획을 짰고, 전 유럽의 궁정을 헤매다니며 왕비를 구하려는 노력을 펼쳤지만, 모두 헛수고로 끝났습니다. 왕비가 죽고 나자, 그는 모든 희망을 잃고, 인생에 대한 환멸과 사람들에 대한 혐오에 빠졌지만,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에 대한 자책감으로 가장 괴로와했습니다. 그는 1791년 6월 20일 왕가의 탈출을 성공시키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으며, 그 실패의 원인이 자기였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 날, 6월 20일, 봉디 (Bondy) 에서 왜 왕비를 떠났을까 ? 아무리 왕이 명령했다고 해도 끝까지 왕비를 따라갔어야 했는데... 그 날 목숨을 바쳐서라도 왕가의 마차를 가로막던 군중들의 손에서 왕비를 보호했어야 했는데... 페르쎈은 젊은 시절부터 매우 꼼꼼하게 (불어로) 일기를 적었는데, 왕비가 죽은 이후의 일기들을 보면 이러한 후회가 도처에 눈에 띕니다. 특히 계속해서 반복되는 문장 : « Ah, que ne suis-je mort pour elle le 20 juin ! » (아, 왜 나는 6월 20일 그녀를 위해 죽지 못했단 말인가 !)

그런데 고국으로 돌아간 페르쎈이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사람들을 피하면 피할수록, 그의 지위와 명예는 높아져만 갔습니다. 그는 쒸에드 (Suède) 왕실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렇게 되자 그를 질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하겠죠. 그는 또한 국민들로부터도 많은 미움을 샀습니다. 쒸에드에도 프랑쓰 혁명의 정신이 점차 퍼지기 시작했는데, 페르쎈은 마리-엉뜨와넷 (Marie-Antoinette) 의 목숨을 빼앗아간 혁명과 프랑쓰, 그리고 민중들을 엄청나게 혐오하여, 극도로 보수적인 정치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1810년 5월 28일, 쒸에드의 왕위계승자가 갑작스럽게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페르쎈의 정적들은 슬며시, 페르쎈이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하여, 왕세자를 독살했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이것은 물론 말도 안되는 이론이었지만, 페르쎈을 미워하던 국민들 사이에서는 마치 사실인 것처럼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하여 왕세자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나섰던 페르쎈은 분노한 스똑꼴므 (Stockholm) 시민들의 손에 갈갈이 찢겨 죽고 말았습니다. 매우 놀랍게도, 이 날이 1810년 6월 20일이었습니다. 결국 어찌보면 페르쎈은 원하던 죽음을 맞이한 셈입니다. 그렇게도 후회했던 6월 20일에, 마리-엉뜨와넷과 마찬가지로 군중들의 손에 죽음을 당했으니까요.

구멍이 숭숭나고 너덜너덜해진 그의 시체 옆에서 폭동에 참가했던 한 사람이 A 와 F (Axel de Fersen 의 머릿글자) 가 수놓아진 시계 하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시계를, 폭동을 제지하러 온 씰베르쓰빠르 (Silversparre) 장군에게 건네며, « 우리는 도둑질은 하지 않는다 » 고 했다고 합니다. 이 시계는 마리-엉뜨와넷이 1785년, 스위쓰의 한 보석상에게 두 개를 만들게 하여, 하나는 그녀가 간직하고, 하나는 페르쎈에게 선물했던 바로 그 시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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