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anche 29 juillet 2007

끌로비쓰를 둘러싼 성인들 (les saints autour de Clovis)

정확한 역사적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전통적으로 끌로비쓰는 496년 12월 25일 랑쓰 (Reims) 에서 삼천명의 부하들과 함께, 당시 랑쓰의 주교였던 성 르미 또는 레미 (saint Remi ou Rémi) 로부터 영세를 받은 것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그전에는 한낱 (?) « 야만인들 » 과 « 이단자들 » 의 두목에 불과했던 끌로비쓰를 기독교의 왕으로 새로 태어나게 함으로써, 성 르미는 프랑쓰가 꺄똘릭 국가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성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끌로비쓰가 개종하는 데에 보다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이 최소한 두 명 더 있는데, 그 중 한 명은 다름 아닌 그의 부인 성녀 끌로띨드 (sainte Clotilde) 였습니다. 끌로비쓰가 프랑쓰 최초의 왕이니만큼, 프랑쓰 최초의 왕비로 여겨지는 끌로띨드는 결혼 이전에 이미 천주교 신자로 개종했었으며, 남편은 물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종교적, 정치적 교육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끌로비쓰가 죽은 후 그녀는 뚜르 (Tours) 의 성 마르땅 수도원에서 은둔해서 살며, 매우 신심이 깊은 생활을 하여, 성인의 품에 올랐습니다.

성녀 끌로띨드에게는 성녀 쥰비에브 (sainte Geneviève) 라는 선생님이 있었는데, 쥰비에브는 또한 끌로비쓰의 정치 조언자이기도 했습니다. 성녀 쥰비에브는 451년 아띨라 (Attila) 가 이끄는 앙족 (Huns) 이 프랑쓰를 침략했을 때, 오로지 기도의 힘으로 빠리를 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빠리의 수호 성인이기도 합니다. 빠리 시내 한복판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작은 산도 하나 있지요. 몽마르트르도 산이라 하기에는 과장된 느낌이 있지만, 이 성녀 쥰비에브 산 (Montagne Sainte-Geneviève) 은 언덕이라는 이름조차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낮습니다. 하지만 워낙 평평한 빠리에서는 이 정도만 되어도 산이라고 부르지요. 이 산을 올라가는 비탈길에 쏘르본 대학교 (Université Paris-IV Sorbonne) 가 있으며, 산의 정상에는 끌로비쓰가 짓게 한 성녀 쥰비에브 수도원 (Abbaye de Sainte-Geneviève) 이 있었습니다. 이 수도원에 성녀 쥰비에브와 성녀 끌로띨드 그리고 끌로비쓰가 매장되었었는데, 그 일부가 프랑쓰 혁명 때 파괴되고, 몇몇 살아 남은 유적은 현재 프랑쓰에서 가장 좋은 고등학교로 꼽히는 엉리 4세 고등학교 (Lycée Henri IV) 의 건물로 쓰이고 있습니다. 또 그 맞은 편에 있는 뻥떼옹도 지금은 프랑쓰의 위인들을 안치하는 공공 건물이지만, 원래는 성녀 쥰비에브에게 바쳐졌던 성당이었습니다.

산 위의 성 에띠엔 성당 (Église Saint-Étienne-du-Mont) 과 엉리 4세 고등학교
성녀 쥰비에브 산 꼭대기 (?) 의 뻥떼옹

vendredi 27 juillet 2007

프랑쓰의 초대왕 끌로비쓰 (Clovis)

프랑쓰 왕의 운명이 쌍-드니의 대성당 (basilique de Saint-Denis)에 안치됨으로써 맺어진다면, 그 시작은 랑쓰의 대성당 (cathédrale de Reims) 에서 출발합니다. 랑쓰는 빠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북동쪽으로 약 130 킬로미터 떨어진 도시인데, 프랑쓰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랑쓰까지 가서, 랑쓰 주교의 축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 과정을 불어로 sacre 라 하고 우리말로는 « 대관식, 즉위식 » 으로 번역하는 일이 잦지만, sacre 라는 말의 진짜 뜻은 « 성스럽게 함, 축성 » 으로서, 관을 쓰는 의식과 꼭 같지는 않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대관식은 축성식을 구성하는 여러 과정 중 하나라 볼 수 있습니다.

실질적으로는 부왕이 죽는 그 순간 아들이 왕이 되지만, 공식적으로는 반드시 랑쓰에 가서 축성 예식을 거쳐야만 했으며, 이 예식을 미루게 되면 왕권에 이의가 제기될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샤를 7세). 그리고 이것은 왕 뿐 아니라 왕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랑쓰 왕과 합법적인 결혼을 하고도 공식 축성을 받지 못했기에 왕비가 되지 못하고, 왕이라는 직업을 가진 한 남자의 부인으로만 남았던 여자들이 있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망뜨농 부인).

끌로비쓰의 영세
이러한 절차를 거치는 것은 왕권이 신으로부터 부여되었음을 상징하려는 의도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도대체 왜 굳이 랑쓰여야만 했을까요 ? 그 이유는 프랑쓰의 최초의 왕으로 여겨지는 끌로비쓰가 영세를 받은 곳이 바로 랑쓰였기 때문입니다. 끌로비쓰는 엄격히 말하면 프렁 쌀리앙 족의 왕으로서, 아직 존재하지 않은 나라였던 프랑쓰의 왕이라 보는 것은 여러가지 해석의 문제를 제기하지만, 그는 사실상 처음으로 훗날 프랑쓰라는 나라가 될 영토의 대부분을 지배했습니다. 프랑쓰의 왕들의 대부분이 Louis 라는 이름을 택한 것도 (루이 1세부터 루이 18세) 끌로비쓰의 후계자임을 자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LouisClovis 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언뜻 보면 전혀 상관없어 보이지만, 16세기 이전까지는 u 와 v 의 구분이 없었음을 알고 나면, Clouis 에서 Louis 라는 이름이 나올 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프랑쓰에서 오래동안 통용되었던 (그리고 어찌 보면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쌀릭법 역시 끌로비쓰가 편찬토록 한 법전이며, 빠리가 프랑쓰의 수도로 정해진 것도 그의 치하 동안이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역사가들이 넓은 의미에서 끌로비쓰를 흔히 프랑쓰의 첫 왕으로 언급합니다. 프랑쓰의 왕들이 랑쓰에서 축성을 받고 싶어 했던 것 역시 끌로비쓰의 전통을 이으려는 노력이지요.

jeudi 19 juillet 2007

성 드니 (Saint Denis)

프랑쓰는 이딸리아와 더불어 가장 많은 성인을 배출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이딸리아 출신의 성인은 600 여명이 조금 넘고, 프랑쓰 출신은 600 여명이 조금 안됩니다. 하지만 사실 성인들의 국적과 수를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한데, 옛날에는 국적의 개념이 없거나 불확실했으며, 국경이 현재와는 달랐고, 또 집단 학살 당한 순교자들의 경우 이름과 정확한 수를 알 수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삶이 어느 정도라도 알려져 있고, 개인적인 명목으로 성인이 된 사람의 수는 대략 2500명 정도이지만, 실제로 이름이 교회력에 기록된 인물들의 수는 그 두 배가 넘으며, 이름 모를 순교자들까지 다 합하면 성인의 수는 수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비록 성인들의 국적을 따지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일이긴 하지만, 몇몇 성인들은 프랑쓰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드니 (Denis) 라는 성인이 있는데, 그는 3세기 무렵 살았던 사람이며, 빠리의 첫 주교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한 지방에 불과했던 빠리와 그 근방에서 선교를 하던 드니는 제국의 박해로 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드니와 그의 제자들의 목이 잘린 장소는 당시 빠리 북쪽의 작은 산이었는데, 드니의 순교 이후 이 산은 Montmartre, 즉 « 순교자 (martyr) 의 산 (mont) » 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몽마르트르의 쒸잔-뷔이쏭 공원 (Square Suzanne-Buisson) 에 있는 성 드니의 동상

그런데 드니는 처형을 당하고도 죽지 않고, 자신의 잘린 목을 손에 들고는 계속하여 북쪽으로 걸어갔다고 합니다. 약 6 킬로 정도를 걷고서야 성 드니는 완전히 목숨이 끊겼고, 그가 쓰러진 자리에는 곧 그를 기념하는 성당이 세워졌으며, 그 자리를 중심으로 하여 쌍-드니 (Saint-Denis) 라 불리는 도시가 형성되었습니다. 오늘날 빠리와 경계를 이루는 이 도시는 가난한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 문제 » 도시의 대명사로 불리지만, 수세기 동안 이 도시는 프랑쓰 왕가의 공식 왕릉 역할을 했습니다. 몇몇 예외들이 있긴 하지만, 사실상 프랑쓰의 거의 모든 왕과 왕비가 성 드니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에 매장되어 있습니다.

mercredi 18 juillet 2007

축일 (fête)

대부분의 프랑쓰 사람들은 생일 외에 축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프랑쓰 사람들에게 한정된 것은 아니고, 국적에 상관없이 천주교 신자들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기에게 이름을 준 성인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런데 프랑쓰나 이딸리아처럼 꺄똘릭 교회의 전통이 강한 나라들에서는 설사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라도 축일이라는 문화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프랑쓰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달력과 수첩 따위에는 매일매일이 어느 성인의 축일인지가 명시되어 있고, 라디오와 텔레비젼에서도 그날 또는 다음날 축하해야할 성인이 누구인지를 꼬박꼬박 방송하지요 (주로 뉴쓰나 일기예보 시간에). 예를 들어, 오늘 (7월 18일) 은 성 프레데릭의 축일 (la saint-Frédéric) 이군요. 가족이나 친구, 동료 중에 프레데릭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오늘 그의 축일을 축하해 줘야 합니다. 축하는 특별한 것은 없고, 그저 « Bonne fête ! » 이라고 얘기해 주는 거지요. 아주 친한 사람들끼리나 종교적인 열성이 강한 가정에서는 작은 선물을 주고 받기도 하지만,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말로 축하해 주는 수준에서 끝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은 종교가 다르거나 아예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별로 거부감없이 행해지고 있는 듯 보입니다.

몇몇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프랑쓰에서는 여전히 한 해의 여러 중요한 날들을 숫자로 보다 성인의 축일로 말하는 습관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따뜻하고 해나는 여름 (올해만 빼고^^) 이 왔음을 말하기 위해서는 굳이 6월 24일이라는 무미건조한 숫자보다는 la saint-Jean (성 졍의 축일) 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쓰지요. 또 la Toussaint (모든 성인의 날) 이라고 하면, 반드시 날짜 (11월 1일) 를 밝히지 않아도 가을이 깊었음을 의미하고, la saint-Sylvestre (성 씰베스트르의 축일 = 12월 31일) 라는 말을 들으면, 에이구, 1년이 또 벌써 다 갔구나 하고 서글퍼들 하지요. ^^

문법적인 설명을 약간 덧붙이자면, 축일을 표현할 때는, 위의 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성인의 이름 앞에 여성 정관사 la 를 덧붙입니다. 뒤에 오는 성인의 이름이 남자 이름이건 여자 이름이건 상관없이 la 를 쓰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la fête de... 의 약자이기 때문이지요. 즉, la saint-Frédéric = la fête du saint Frédéric ;
la sainte-Charlotte = la fête de la sainte Charlotte (7월 17일)

samedi 14 juillet 2007

생일 (anniversaire)

프랑쓰말로 « 생일 » 은 anniversaire 라고 합니다. 이 말은 라띠나어 형용사 anniversarius 에서 왔으며, 이 단어 자체는 annus (해, 연) 과 versare (돌다, 돌리다, 회전하다) 동사가 결합되서 생긴 말로,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 매년 돌아오는, 해마다 돌아오는 » 이란 뜻입니다.

영어의 birthday 나 독어의 Geburtstag, 그리고 우리말의 생일 이란 단어는 « 태어난 날 »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흔히 생일이라고 부르는 날은 실제로 태어난 날이 아니라, 태어난 날과 같은 날짜를 매년 기념하는 것일 뿐이지요. 그래서 불어는 두 용어를 뚜렷이 구분해서 씁니다. « 실제 출생한 날 » = date de naissance ; « 그 날을 매년 기념하는 날 » = (date) anniversaire. (역시 더 논리적인 불어 ^^)

하지만 불어의 anniversaire 는 그 어원에 충실하게도, 생일 뿐 아니라 무슨 날이든지 간에 일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날이면 모두 지칭하기에 사실 역시 혼돈의 염려가 있습니다. 절대적인 용법으로 쓰이면 « 생일 » 을 의미하고, 그 외의 경우에는 필요한 수식어를 덧붙이거나 문맥상 판단해야지요.
« 출생기념일 » = anniversaire 또는 anniversaire de naissance,
« 결혼기념일 » = anniversaire de mariage,
« 사망기념일 » = anniversaire de mort,
etc.
그리고 개인적인 기념일들 뿐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할 때도 같은 단어를 씁니다. 오늘, 2007년 7월 14일은 프랑쓰 혁명의 218e anniversaire.

이딸리아말과 에스빠냐말은 기타 기념일들로부터 출생 기념일을 다시 구분합니다. 이딸리아말로 « 생일 » 을 뜻하는 compleanno 는 에스빠냐말 cumpleaños 로 부터 왔는데, 이 단어는 cumplir (채우다) 와 año (해, 연) 이 복합된 말입니다. 즉 « 한 해를 다 채운 날, 한 살 더 먹은 날 » 이라는 뜻이죠.

불어로 생일 축하 인사는 매우 쉽습니다. Bon anniversaire 또는 joyeux anniversaire 라고 하면 되지요. 오늘 생일인 분들께 (et en particulier à ma lectrice fidèle), 그림으로나마 맛있는 케익을 대접하며, joyeux anniversaire !

jeudi 12 juillet 2007

farfalle à la niçoise (니쓰식 파르팔)

니쓰식 쌀라드 (salade à la niçoise) 라고 하는 것은 재료가 꼭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참치와 토마토, 검은 올리브, 멸치는 반드시 들어간 쌀라드를 말합니다. 이것을 응용하여, 나비 모양의 국수 파르팔 (farfalle = 이딸리아말 farfalla = « 나비 ») 과 깍지콩을 넣어 쌀라드를 만들었습니다.

mercredi 11 juillet 2007

rattes au jambon de Parme (빠르마 햄으로 감싼 감자)

ratte (껍질채 먹는 작은 감자) 를 깨끗이 씻어 물에 삶고, 얇게 썰은 빠르마 햄으로 감싼 다음 뜨거운 오븐에 다시 굽습니다 (햄이 바삭해 질 때까지). 꽃소금을 살짝 뿌려가며 호호 불면서 먹습니다.


mardi 10 juillet 2007

galette de pomme de terre aux œufs de saumon (연어알을 얹은 감자 부침)

감자를 갈아 물기를 뺀 후 바삭하게 부치고, 연어알을 얹습니다. (쏘쓰는 부추를 잘게 썰어 넣은 크림)

lundi 9 juillet 2007

faux amis entre le français et l'anglais (suite)

  • 불어 joli 는 « 예쁜 », 영어 jolly 는 « 즐거운, 재밌는 » ;
  • 불어 journée 는 « 하루, 한나절 », 영어 journey 는 « 여행 » (왜냐면 애초에는 하루 일정으로 할 수 있는 여행을 뜻했기 때문) ;
  • 불어 lecture 는 « 독서, 모든 종류의 읽기 », 영어 lecture 는 « 강의, 연설 » ;
  • 영어 novel 은 « 소설 », 불어 nouvelle 은 단지 « 단편 소설 » ;
  • 영어 library 는 « 도서실 », 불어 librarie 는 « 서점 » ;
  • 영어 nurse 는 « 간호원 », 불어 nurse 는 « 특별히 어린이들만 돌보는 간호원, 보모, 유모 » ;
  • 불어 pain 은 먹는 « 빵 », 영어 pain 은 « 고통 » ;
  • 불어 if 는 « 나무의 한 종류 », 영어 if 는 « 만약 » ;
  • 불어 but 은 « 목적, 목표 », 영어 but 은 « 하지만 » ;
  • 불어 pour 는 전치사 « -를 위하여 », 영어 pour 는 동사 « 붓다 » ;
  • 불어 on 은 주격 부정대명사 « 사람들은... », 영어 on 은 전치사 « - 위에 » ;
  • 불어 four 는 « 가마 », 영어 four 는 « 4 » ;
  • 불어 consumer 는 « 불태우다 » 라는 동사, 영어 consumer 는 « 소비자 » 라는 명사
  • 불어 kidnapper 는 « 납치하다 » 라는 동사, 영어 kidnapper 는 « 납치자 » ;
  • 불어 coin 은 « 구석 », 영어 coin 은 « 동전 » ;
  • 불어 patron 은 « 사장 », 영어 patron 은 « 손님 » ;
  • 영어 puzzle 은 « 온갖 종류의 퍼즐 », 불어 puzzle 은 « 그림 맞추기 퍼즐 » 만을 의미합니다 (영어의 jigsaw puzzle) ;
  • 불어 regard 는 « 시선 », 영어 regard 는 « 관심, 안부 » ;
  • 불어 sensible 은 « 민감한 », 영어 sensible 은 « 이성적인, 현명한 » ;
  • 영어 sentence 는 온갖 종류의 « 문장 », 불어 sentence 는 « 법원의 판결문 » ;
  • 영어 slip 은 « 여자용 속옷, 속치마 », 불어 slip 은 « 삼각 팬티, (주로) 남자용 속옷 » ;
  • 영어 smoking 은 to smoke 의 현재분사, 불어 smoking 은 « 남자용 정장 » (영국에서 dinner jacket, 미국에서 tuxedo 라 부르는) ;
  • 영어 speaker 는 온갖 종류의 « 말하는 사람 », 불어 speaker 는 « 텔레비젼에서 프로그람 안내를 하는 사람 » ;
  • 영어 stage 는 « 단계, 과정, 또는 무대 », 불어 stage 는 « 견습, 견습 기간 » ;
  • 불어 versatile 은 « 하나도 제대로 못하면서 여기저기 관심만 많은, 변덕스러운, 촐싹대는, 진지하지 못한 », 영어 versatile 은 « 이거저거 다 잘 하는, 재능이 많은 » ;
  • 영어 surname 은 « 성 », 불어 surnom 은 « 별명 ».

samedi 7 juillet 2007

가짜 친구들 (faux amis)

서로 다른 두 언어 사이에 표기는 같지만 뜻이 다른 단어들을 불어로 faux amis, 즉 « 가짜 친구들 » 이라 부릅니다. 예를 들어 sale 이라는 단어는 불어로는 « 더러운 » 이라는 뜻의 형용사이지만, 영어로는 « 판매 » 라는 명사이고, 이딸리아어로는 « 소금 » 이라는 뜻이며, 에스빠냐어로는 salir « 밖으로 나가다 » 동사의 3인칭 현재형입니다. 불어가 가장 많은 가짜 친구들을 공유하고 있는 언어는 영어로서, 그 이유는 14세기 말까지 불어가 공식 언어였던 영국에 대다수의 불어 단어가 그대로 넘어갔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세월이 흐르다보니 뜻과 철자에 약간씩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영어와 불어의 가짜 친구들 사이에는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1. 철자가 완전히 똑같고 어원도 동일하지만, 뜻이 약간 다른 경우 : 불어의 lard 와 영어의 lard ;
  2. 같은 어원을 가지지만, 철자와 뜻이 조금 다른 경우 : 불어의 actuel = « 현재의 », 영어의 actual = « 사실의 » ;
  3. 철자는 같거나 비슷하지만, 어원과 기능, 그리고 뜻은 완전히 다른 경우 : 불어의 seize = 숫자 « 16 », 영어의 seize = 동사 « 잡다 ».

사실 이 마지막 같은 경우들은 너무나 분명히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모양이 비슷해도, 혼돈을 일으키는 경우가 적습니다. 문제는 1번과 2번 같은 예들이지요. 그 중 자주 실수가 일어나거나 재밌는 예들 몇가지 :

  • 불어 éventuellement 은 « 경우에 따라서는, 어쩌면 » ; 영어 eventually 는 « 마침내 » ;
  • 불어 amoureux 는 « 사랑하는, 사랑에 빠진 », 영어 amorous 는 « 성적인 욕망을 느끼는 » ;
  • 영어 car 는 온갖 종류의 « 차 » 이지만, 불어 car 는 오로지 « 관광버스 » ;
  • 불어 casserole 은 « 냄비 », 영어 casserole 은 « 냄비로 만든 음식 (찌개류) » ;
  • 불어 chandelier 는 « 탁자 따위에 놓는 촛대 », 영어 chandelier 는 « 천정에 매다는, 수많은 가지가 있는 대형 조명 장치 » (불어로 이런 뜻을 가진 말은 lustre) ;
  • 영어 palace 는 « 궁전 », 불어 palace 는 « 궁전처럼 화려한 호텔 (별 네 개 이상) » ;
  • 영어 chiffon 은 « 부드럽고 하늘하늘한 비단 », 불어 chiffon 은 « 걸레 »;
  • 불어 grappe 은 « 포도 송이, 포도 다발 », 영어 grape 은 « 포도 한 알 한 알 » ;
  • 불어 raisin 은 « 포도 한 알 한 알 », 영어 raisin 은 « 건포도 » (불어로 « 건포도 »는 raisin sec) ;
  • 불어 prune 은 « 자두 », 영어 prune 은 « 말린 자두 ». (불어로 « 말린 자두 » 는 pruneau ) ;
  • 영어 injure 는 « 상처를 입히다 », 불어 injurier 는 « 말로 상처를 입히다, 즉 욕하다 ».
다음편에 계속 (suite)...

vendredi 6 juillet 2007

베이컨 등등 (bacon, etc.)

영어인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bacon 이라는 단어는 사실 프랑쓰말입니다. 이 말 자체는 프렁씩어 (francique = 프렁족의 언어) bakko 에서 왔으며, 프랑쓰에서는 18세기까지 [바꽁] 이라 발음했었는데, 19세기에 이것이 전형적인 영국 음식인 것처럼 여겨지면서 역수입되어, 현재는 프랑쓰에서도 [베껀] 비슷하게 발음합니다. 그런 점에서 베이컨은 영국 크림과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프렁씩어 bakko 는 애초에 « 등 » 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즉 « 돼지의 등에서 얻은 고기 » 라는 뜻이죠. 프렁씩어와 형제 관계에 있는 영어에는 그래서 back 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bakkoback 은 모두 제르마닉어에서 같은 어원을 가졌던 것이라 유추됩니다.

재밌는 것은, bacon 을 이딸리아말로는 pancetta [빤체따] 라 하고, 에스빠냐말로는 panceta [빤세따] 라 칭하기도 하는데, 이 두 말은 모두 라띠나어 pantices [빤띠께쓰] 로부터 왔고, pantices 는 « 배 » 라는 뜻이었습니다 (불어 panse = « 배 »). 그러니까 « 돼지의 배로부터 얻은 고기 » 였던 것이지요.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베이컨과 빤체따는 조금 다릅니다. 특히 기름기의 면에서, 베이컨이 좀 더 기름이 적고, 빤체따가 조금 더 많죠.

따라서 pancetta, panceta 를 불어로 번역할 때 bacon 이라 하지 않고 lard 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lard 는 돼지의 가슴과 배 부위에서 얻은 고기로, 기름이 살과 번갈아 가면서 한 줄씩 들어 있는, 즉 우리나라에서 « 삼겹살 » 이라 부르는 고기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삼겹살은 생고기를 구워 먹는 것인데 반해서, 라르는 생고기일 때도 있지만, 소금이나 연기 등으로 처리가 되어 있을 때가 많고, 자르는 모양도 다릅니다.

lard 라는 단어는 bacon 과 마찬가지로 영어로 그대로 건너갔는데, bacon 이 영국에서나 프랑쓰에서나 비슷한 식품을 가리키는데 비해, lard 는 다릅니다. 프랑쓰에서 lard 라 부르는 것은 영국에서는 streaky bacon 이라 부르고, 영어로 lard 라 부르는 것은 순전히 기름 덩어리로, 돼지의 기름진 부위들을 녹여서 얻어낸 허연 물질입니다. 프랑쓰에서는 이것을 saindoux (부드러운 기름) 라 부르고, 이딸리아말로는 strutto (녹임) 라 합니다. 쌍두는 옛날에 버터나 식물성 기름이 없거나 귀할 때 음식을 익히는 데 자주 사용되었었습니다.

요약 (저 밑에)

























불어 영어 이딸리아어 한국어
bacon bacon bacon 또는 pancetta 베이컨
lard streaky bacon pancetta 삼겹살 ?
saindoux lard strutto 돼지 기름 ?

jeudi 5 juillet 2007

haricots verts au bacon (베이컨으로 돌돌 말은 깍지콩)

깍지콩을 소금물에 삶아서 식으면 베이컨으로 말아 기름에 바삭하게 굽습니다.


haricots verts au bacon

dimanche 1 juillet 2007

Un entretien avec Marina Hands

“Ça va mieux, mais je me trouvais tarte.”

Son interprétation de lady Chatterley lui a offert un césar. Comédienne pudique, Marina Hands a longtemps eu peur d’elle-même et de ses origines.

Elle n’a que 30 ans, et vient de connaître la consécration. Un césar de la meilleure actrice pour Lady Chatterley, de Pascale Ferran, et puis deux grands rôles en alternance à la Comédie-Française, où elle est pensionnaire depuis le 1er janvier 2006 : Ysé dans Partage de midi, de Paul Claudel, bientôt Célimène dans une nouvelle mise en scène du Misanthrope. L’année Marina Hands... Normal pour une enfant de la balle ? Sa mère, Ludmila Mikaël était dans les années 70 la jeune première du Français, où elle a connu le futur père de Marina, l’Anglais Terry Hands, venu monter Shakespeare (Richard III ; Périclès, prince de Tyr ; La Nuit des rois).
Mais non, au contraire, confesse cette douce et grande jeune femme au visage angélique et à la voix cristalline, longtemps le théâtre ne l’a pas tentée. Elle se rêvait cavalière, se découvre actrice sur le tard, d’abord sur les planches et puis sur grand écran, où Pascale Ferran a l’intuition de faire de cette introvertie une amante sensuelle, en harmonie avec la nature. Marina Hands n’en revient pas d’avoir su le faire avec un naturel si rayonnant. Elle rit souvent, ne cache rien de ses doutes et de ses certitudes. Le cinéma français a pris l’habitude de trop vite consumer ses jeunes héroïnes. Mais Marina, qui rêve d’une « carrière à la Binoche », est là pour longtemps, la tête sur les épaules et les mots pour le dire.

Est-ce que vous sentez un changement dans le regard que l’on porte sur vous, depuis votre césar ?
Oh, ce n’est pas l’émeute ! Des gens m’abordent gentiment dans les cafés, j’ai reçu plusieurs propositions de films, mais ma vie n’est pas bouleversée. J’ai repris les répétitions à la Comédie-Française dès le lundi qui suivait la cérémonie, je n’ai peut-être pas encore eu le temps de réaliser. Mais cela donne de l’énergie dans le travail, et je suis surtout heureuse pour Lady Chatterley, qui profite d’une seconde chance.

Les Césars ont récompensé un film qui s’est fait dans des conditions très chaotiques, et dont l’accueil a d’abord été timide… Est-ce que vous avez eu peur, parfois, de vous être trop investie, d’avoir trop donné ?
J’ai envisagé cette question tout le temps. Il y a eu des moments où je me disais : qu’est-ce que je fous là ? D’autant qu’au cinéma, contrairement au théâtre, il y a cette longue période où l’on crée à vide, où l’on n’a pas d’autre retour sur son travail que le regard du metteur en scène. Et puis, c’est vrai, Lady Chatterley a été une aventure de bout en bout. Deux semaines après le début du tournage, le producteur a annoncé qu’il n’y avait plus d’argent. Le film a failli s’arrêter, mais c’était comme si la machine continuait à fonctionner toute seule. Le tournage était dur, éprouvant, avec une petite équipe. Dans les moments où l’on ne se sentait soutenus par personne, on se sauvait mutuellement en essayant de rendre les journées les plus productives possible… Après, je suis partie sur le tournage de Ne le dis à personne, de Guillaume Canet, un film à plus gros budget, et c’était un autre monde.

Comment Pascale Ferran vous a-t-elle choisie ?

J’ai passé des essais. Pascale m’avait vue au théâtre dans Phèdre, monté par Patrice Chéreau, et dans le téléfilm Un pique-nique chez Osiris, écrit par Nina Companeez. On s’est rencontrées plusieurs fois. Je lui ai vite parlé de ma frayeur des scènes de nu. Je ne me sentais pas capable de faire tout ce qui était écrit dans le scénario, et curieusement elle était ravie. Elle ne voulait pas d’une actrice pour qui ces scènes n’auraient pas été un problème. Je me suis servie, bien sûr, de ces inhibitions pour le personnage.

Pour vous, c’est un film sur le plaisir ?
Pascale Ferran dit que c’est un manifeste pour la joie, pour que la priorité soit donnée au bonheur et au plaisir. La plénitude de l’amour est une chose profonde et primordiale. Je l’ai accompagnée en province, où elle a participé à plusieurs débats : souvent les spectateurs croient déceler chez Constance Chatterley une forme d’innocence, de naïveté, un côté « Oui-Oui au milieu des fleurs » ; mais c’est plus complexe : c’est plutôt une nouvelle naissance, un retour à l’innocence. La version longue du film, que proposera bientôt Arte (1), le montre davantage, à travers des échanges entre Constance et son mari et des passages où son angoisse est perceptible. Je ne peux pas dire que ces projections publiques aient été un plaisir : rentrer dans la salle juste après la projection, recevoir les réactions à chaud, sur un film où je me sens tout de même exposée de la tête aux pieds, c’est franchement intimidant. On me questionnait d’ailleurs sur ce paradoxe : être soi-même très pudique et montrer sa nudité en incarnant un personnage qui ne l’est pas…

Et votre propre réaction à la première vision du film ?
Je ne l’ai vu que terminé. Je ne voulais pas voir les rushes tant que je n’avais pas fini de tourner. Je savais que si je me voyais, j’allais me détester, j’allais commencer à pinailler sur des bêtises, à dire « mon nez ne va pas », « ce n’est pas le bon profil », etc. Se regarder, c’est l’ennemi du jeu, en tout cas pour moi. En découvrant le film, j’ai été impressionnée par le cadrage et la lumière, des aspects dont je ne me rendais pas bien compte pendant le tournage. Mais me voir, moi ? C’était assez horrible. J’ai honte de le dire, mais c’est comme ça.

Vous êtes la fille d’une comédienne et d’un metteur en scène. Quel regard portiez-vous enfant sur le métier de comédien ?
Il était très différent selon que j’étais avec l’un ou l’autre de mes parents. Mon père vivait en Angleterre, et il m’emmenait partout. Je me souviens d’heures passées à suivre les répétitions des pièces qu’il montait, à me promener sur le plateau, au milieu du décor. J’ai vu ses spectacles très jeune, ils étaient en anglais et, au début, je ne comprenais pas tout, mais la curiosité était forte. Ma mère, avec qui je vivais au quotidien à Paris, me protégeait beaucoup de son métier. Elle voulait que j’aie une enfance normale, elle ne me traînait pas sur les tournages. J’allais la voir jouer au Français, mais c’est tout. A la regarder sur scène, parfois, je la sentais exposée, un peu en danger, avec tous ces gens portant sur elle un regard intense. Je me souviens d’une gifle qu’elle recevait dans Les Caprices de Marianne, j’étais très jeune, j’avais hurlé, il avait fallu m’emmener hors de la salle ! J’ai des souvenirs plus précis de La Trilogie de la villégiature, mise en scène par Giorgio Strehler, ou du Soulier de satin, monté par Antoine Vitez.

Vous avez longtemps résisté à la vocation d’être comédienne. Comment s’est-elle affirmée ?
C’était le domaine de mes parents, qui étaient très investis dans leur travail, sans doute voulais-je me démarquer d’eux… Je ne sais pas très bien pourquoi, mais quand on me disait « tu vas faire comme ta maman » sortait de moi un « non ! » épidermique. J’avais la passion de l’équitation. J’avais atteint un niveau très honorable, presque professionnel : une limite que je n’ai jamais réussi à franchir. J’avais la poisse : je travaillais dur et puis juste avant les championnats, il y avait toujours un pépin, mon cheval qui boitait, ou autre chose. La possibilité d’en faire mon métier s’est éloignée, la question des études s’est posée. J’ai suivi des copines au cours Florent, et cela a été un choc presque physiologique. Jouer était thérapeutique.

C’est-à-dire ?
J’étais très inhibée, verrouillée, bloquée, et tout d’un coup je me suis libérée. J’ai découvert que je ne vivais pas du tout en phase avec mes désirs, mes émotions. Incarner des personnages révélait des sensations insoupçonnées. Sur scène, j’avais l’impression d’être au bon endroit. Après est né un sentiment d’imposture d’une autre sorte : il provenait des ragots, des bruits de couloir, on disait que j’étais peut-être là parce que j’étais la fille de mes parents. Je n’y avais jamais vraiment pensé : mes parents, ce n’est pas le show-biz ni les couvertures des magazines ! Mais je l’ai mal vécu. Je me disais : « C’est peut-être vrai, après tout…»

L’entrée au Conservatoire a dû être un gage de légitimité…
Mais l’admission même devenait suspecte aux yeux de certains !

Vos parents en disaient quoi ?
Ils n’en revenaient pas que j’aie choisi cette voie. Et ce n’est pas forcément ce qu’ils avaient souhaité pour moi. On n’en parlait pas trop : je voulais y arriver seule, ne pas solliciter leur aide. Comprendre seule si mon désir était profond ou si c’était une facilité de choix de vie.

En deuxième année de Conservatoire, vous partez compléter votre formation en Angleterre. Pourquoi ?
Parce que les acteurs anglais sont des références pour moi. La carrière de Judi Dench, par exemple, cette immense actrice que l’on a vue, récemment, dans Chronique d’un scandale ! J’ai vu les plus grands sur scène, quand mon père codirigeait la Royal Shakespeare Company. J’ai vu Jeremy Irons, j’ai vu Helen Mirren. Ce sont des acteurs de théâtre qui sont devenus des stars au cinéma parce qu’il n’y a pas cette frontière exaspérante qui existe en France. La formation de l’acteur est très différente en Grande-Bretagne : elle est plus complète, avec des sections pour la voix, d’autres pour le corps. On vous apprend concrètement à utiliser tous ces instruments. Et puis il n’y a pas de débat théorique sur ce qui serait le bon ou le mauvais théâtre. L’urgence est de pouvoir travailler vite et de vivre de son métier. En France, au Conservatoire, l’enseignement de l’art dramatique ressemble plus à des master classes : on suit un professeur pendant un an, qui vous donne sa philosophie du théâtre.

Est-ce que l’on peut dire, pour résumer, qu’il y a en Grande-Bretagne une «mécanique de l’acteur », là où en France il s’agirait plutôt d’une mystique...
C’est tout à fait ça. Je trouve d’ailleurs troublant que, depuis quelques années, certaines personnes s’essaient au théâtre comme si c’était un art qui s’improvisait. Exactement comme si, demain, avec un bon professeur de chant et en me tenant face au public, je me disais capable de chanter La Traviata... Mais, par ailleurs, la technique ne peut pas être une fin en soi. Elle doit être au service de l’expression. C’est un pont entre l’intérieur de soi et la façon dont on le transmet à l’extérieur. Cela devient un langage propre.

Que se passe-t-il après le Conservatoire ?
J’ai travaillé tout de suite. J’ai commencé dans le théâtre privé, avec Robert Hirsch à la Porte-Saint-Martin. Une chance, et un choix. Des amis du Conservatoire me disaient : « Quoi, tu vas aller faire cette merde dans le privé ! ? » Ma mère, elle, me soutenait très tendrement. Ensuite, j’ai été choisie par Andrzej Zulawski pour jouer la sœur de Sophie Marceau dans La Fidélité. Je n’avais jamais songé au cinéma, je pensais que je n’étais pas « cinégénique », que je n’étais pas intéressante à filmer.

Vous ne vous trouviez pas moche, quand même ?
Oh ! si. Je travaille sur ce complexe, ça va mieux, mais je me trouvais tarte, sans intérêt. Et puis je ne voulais pas considérer mon physique, les questions d’image. Au théâtre, le problème se pose moins. J’ai toujours pensé que le cinéma, eh bien... ça viendrait ou pas et que ça ne dépendait pas de moi. D’ailleurs, quand je passais des castings, je n’étais pas prise. Après le succès d’Amélie Poulain, les petites brunes piquantes avaient la cote : moi, j’étais trop grande. Ou, en tout cas, c’est clair, je ne faisais pas rêver.

Vous avez déjà eu le temps d’éprouver des déceptions professionnelles ?
Bien sûr, oui, et je suis assez costaude pour les encaisser. Dans la vie, il y a toujours la loi des séries : cette période où j’étais choisie par des cinéastes, et puis virée au dernier moment parce que je n’étais pas assez connue. Impossible de réunir des financements sur mon nom. Ou bien le réalisateur m’appelait : « Bon, c’est mort pour le rôle principal, mais si tu veux, il y a ce second rôle, là... »

Comment est-ce que l’on entre à la Comédie-Française ?
L’administrateur vous le propose. En l’occurrence, Marcel Bozonnet. Il m’avait déjà approchée à deux reprises, mais j’étais en train de tourner. C’est parce que j’ai résolu mon problème de légitimité que j’ai pu rentrer au Français, et non l’inverse. J’avais envie de travailler à l’année, dans une troupe, de faire l’expérience d’un travail permanent.

Quand vous arrivez au Français, début 2006, on est en pleine guerre des clans, qui va se résoudre, à l’été, par la nomination surprise de Muriel Mayette à la tête du théâtre. Comment le vit-on de l’intérieur ?
Uniquement par ce qu’en disent les uns et les autres. Que les soixante artistes de la maison aient chacun leurs goûts et leurs envies ne paraît pas étonnant. Le changement a été brutal, mais Muriel Mayette a fait preuve d’une grande diplomatie. Je l’ai connue au Conservatoire, où j’ai été son élève.

Vous parlez du Français avec votre mère ?
Les situations sont très différentes : quand elle y est rentrée, c’était une époque de grande hiérarchie entre les pensionnaires et les sociétaires. Ce n’était pas facile : les « congés », par exemple, pour aller faire du cinéma, étaient donnés au compte-gouttes. Mais c’était aussi une période flamboyante avec des spectacles qui ont fait date. C’est pour cela qu’elle y est restée vingt ans, au prix peut-être d’une autre carrière sur grand écran.

Vous reprenez le rôle d’Ysé dans Partage de midi, de Paul Claudel. Un rôle que votre mère a joué dans une mise en scène référence d’Antoine Vitez...
Dieu merci ! Je ne l’ai pas vue sur scène à l’époque ! Cela ne m’effraie pas particulièrement, depuis trente ans, elle n’est pas la seule avoir joué Ysé. Mais je ne veux pas effacer le souvenir que les gens gardent d’elle, au contraire, le raviver me rendrait heureuse. Je vais essayer de transmettre la beauté de ce texte et d’incarner la langue splendide de Claudel. Ce que j’adore dans son œuvre, c’est qu’elle pose la question de l’être humain dans toute sa noirceur et sa complexité. C’est tout le contraire de D. H. Lawrence, pour qui l’amour est générosité, sans l’obsession de la possession. Chez Claudel, il y a passion, combustion, désir d’avoir l’autre pour soi seul. Il y a une dimension presque adolescente dans sa vision de l’amour.

(1) Intitulée Lady Chatterley et l’homme des bois, elle sera diffusée le 1er ju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