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redi 31 octobre 2007

뚜르느도 로씨니 (tournedos Rossini)

뚜르느도는 소고기살을 지름 약 8-10 쎈띠, 두께 약 2 쎈띠 정도로 잘라, 바르드로 동그랗게 둘러싼 조각을 말합니다. 부엌에서 사용되는 바르드 (une barde) 는 쎌트 문화의 음악가 (un barde) 와는 전혀 무관한 단어로, 돼지의 지방질을 얇은 천 형태로 만든 것입니다. 프랑쓰 음식에서는 바르드로 고기를 싸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 이유는 모양을 보존하기 위해서이거나, 뜨거운 열에서 오래 구울 때 고기가 겉만 너무 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등입니다. 물론 상에 내기 전에 바르드와 바르드를 묶는데 사용된 실을 잘 벗겨내야지요.

tournedos 는 동사 tourner (회전하다, 돌다) 와 명사 dos (등) 으로 구성된 말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정확히 왜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19세기 언어학자였던 리트레 (Émile Littré) 의 가설에 의하면,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이 고기가 든 접시를 등 뒤로 돌려가며 먹었기 때문일 것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또다시 궁금한 것은 왜 그래야 했는가이지요. 현대의 불어 사전들도 리트레의 막연한 가설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그저 재인용하기만 할 뿐이어서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습니다.

뚜르느도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요리되는데, 그 중 특히 작곡가 로씨니 (Gioacchino Rossini) 가 발명한 요리법이 유명합니다. 로씨니는 구운 뚜르느도에 트뤼프 버섯과 프와 그라 (거위나 오리의 간) 를 얇게 저며 한 조각씩 얹어서 먹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당시 빠리에서 많은 예술인들과 지식인들이 모이던 꺄페 엉글레 (Café Anglais) 의 주방장이 로씨니로부터 직접 이 요리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트뤼프와 프와 그라처럼 귀한 재료가 들어가느니 만큼 자주 먹기는 힘들고, 성탄절이나 연초 같은 큰 명절 때 주로 먹습니다. 불행히도 저는 날개달린 동물은 만지지 않으므로, 뚜르느도 로씨니를 만들어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lundi 29 octobre 2007

싸바랑 (savarin)

싸바랑이라는 과자의 이름은 프랑쓰의 법관, 작가, 미식가였던 엉뗄므 브리야-싸바랑 (Anthelme Brillat-Savarin, 1755-1826) 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프랄린이나 베샤멜, 까르빠쵸 등이 진짜 요리법 발명가가 아니라, 제 삼자의 이름을 딴 데 비해서, 싸바랑은 실제로 브리야-싸바랑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입헌의회 (Assemblée constituante) 의 의원으로 혁명에 참여하기도 했던 브리야-싸바랑은 1825년에 무명으로 맛의 생리학 또는 선험적 식도락의 명상 (La Physiologie du goût ou Méditations de gastronomie transcendante) 이라는 책을 내었는데, 저는 읽어보지 못했지만, 제법 재밌는 책일 듯 싶습니다. 격언과 일화, 요리법 등으로 당대 사회를 명상하고 있는 책이라고 합니다.

싸바랑은 밀가루, 달걀, 크림, 우유 등을 반죽하여 둥근 모양으로 구운 말랑말랑한 빵에 럼과 설탕물을 입혀 촉촉하게 적신 후, 셩띠이 크림과 설탕에 절인 버찌, 엉젤릭으로 장식한 과자입니다. 원래는 크게 만든 후 잘라 먹는데, 요즘 빵집에 가면, 개인용으로도 만들어서 팝니다. 또 싸바랑과 매우 비슷한 과자로, 바바 또는 바바 오 럼 (baba au rhum) 이 있습니다. 사실상 똑같은 반죽을 사용하고, 럼을 넣는 것이나 장식 마저도 흡사한 바바는 반죽에 건포도가 들어간다는 점에서 유일하게 싸바랑과 다릅니다.

빵집에서 산 싸바랑

samedi 27 octobre 2007

프랄린 (praline)

프랄린은 아몬드 (amande) 를 설탕에 졸여 만든 사탕의 일종으로, 쎄자르 드 슈와즐 뒤 쁠레씨-프랄랑 (César de Choiseul du Plessis-Praslin, 1598-1675) 의 이름을 땄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의 요리사가 실수로 아몬드를 끓는 설탕물에 빠트리는 바람에 이 사탕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요즘은 아몬드 외에도 다른 견과들 (주로 땅콩, 또는 개암) 로도 만드는 프랄린은 그 자체로 먹기도 하고, 빻아서 다른 사탕, 과자, 아이스크림 등에 섞기도 합니다. 빻아진 프랄린은 프랄랑 (pralin) 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이와는 조금 다르게, 벨직에서는 쵸콜렛으로 만든 사탕들을 프랄린이라고 부르는데, 벨직의 쵸콜렛이 프랑쓰에도 유명하다보니, 불어에서도 사탕 모양의 쵸콜렛들을 프랄린이라고 부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벨직의 프랄린은 처음에는 실제로 프랄랑과 쵸콜렛을 섞어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되었지만, 이제는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대신 다양한 맛과 향의 크림, 버터, 술, 과일 조각 등등이 첨가되지요. 실제로 프랄랑을 넣은 경우에는 chocolat praliné (프랄린화된 쵸콜렛) 라고 명시하기도 합니다.

프랄린의 사진도 올리고 싶으나, 집에 마침 프랄랑 (빻은 프랄린) 밖에 없기에...

프랄랑을 이용해서 만든 쵸코 갈렛 (la recette par ici)
chocolats pralinés

vendredi 26 octobre 2007

베샤멜 쏘쓰 (sauce béchamel)

화가 까르빠쵸가 음식에 이름을 주었듯이, 프랑쓰의 재정가 (financier) 이자 미식가였던 루이 드 베샤멜 (Louis de Béchamel, 1630-1703) 은 베샤멜 쏘쓰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물론 그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닐테고, 필경 그의 요리사가 그를 위해서, 또는 그의 요청을 받고 만들었을 것입니다. 밀가루와 우유로 만드는 베샤멜 쏘쓰는 오늘날 여러 종류의 음식에 응용되는 기본 쏘쓰의 한가지가 되었습니다.

베샤멜 쏘쓰는 만들기 매우 쉽습니다 : 50 그람의 버터를 냄비에 넣고 약한 불에 녹입니다. 50 그람의 밀가루를 녹인 버터와 섞습니다. 거품기로 저어주며 약한 불에서 이삼분간 익힙니다. 반죽이 고르게 되면 50 썽띠리트르의 우유를 조금씩 부어가며 열심히 젓습니다. 약한 불에서 천천히 저어주며 약 십분간 끓입니다. 소금과 후추, 뮈스꺄드로 간합니다.

어떤 요리법들을 보면, 우유의 일부를 육수나 야채 국물로 대체하기도 하고, 마지막에 달걀 노른자를 넣기도 하고, 토마토 쏘쓰를 넣어 분홍색 베샤멜 쏘쓰를 만들기도 합니다.

완성된 쏘쓰는 주로 야채에 끼얹어 그라땅을 만드는데 사용되지만, 그외에도 치즈와 섞어 쑤플레를 만들 수도 있으며, 다양한 면 종류에도 잘 어울리고, 때로는 물고기와 곁들여 먹기도 합니다.

베샤멜 쏘쓰

mercredi 24 octobre 2007

까르빠쵸 (carpaccio)

까르빠쵸는 소고기를 매우매우 얇게 썰어 (거의 투명하게), 날로 먹는 음식입니다. 까르빠쵸라는 음식명은 베네치아의 화가 비또레 까르빠쵸 (Vittore Carpaccio, 1460-1525/1526) 에게서 딴 것인데, 실제로 바이올린 연주에 뛰어났던 앙그르의 경우와는 달리, 화가 까르빠쵸는 육회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습니다. 이 음식은 1960년대에 베네치아의 유명한 식당 아리쓰 바 (Harry's Bar) 에서 발명되었으며, 당시 아리쓰 바의 주인이었던 쥬제뻬 치프리아니 (Gisueppe Cipriani) 에 의해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어떤 설에 의하면 이 음식이 당시 베네치아에서 열렸던 까르빠쵸 회고전을 계기로 발명되었기 때문이라고 하고, 또 다른 설에 의하면 고기의 빨간색이 화가 까르빠쵸가 즐겨 다룬 색깔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까르빠쵸용 고기는 두말할 나위 없이 매우 신선한 것을 써야 하고, 냉동실에 약 한시간 정도 두었다가 꺼내면, 집에서도 얇게 자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기계로 썰은 것처럼은 하기 힘들지요. 그래서 저는 다 썰어진 것을 삽니다. ^^ 까르빠쵸는 올리브 기름은 기본이고, 그 외 어떤 부재료를 첨가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맛을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소고기 외에도 물고기, 야채, 과일 까르빠쵸도 많이 만듭니다.

까르빠쵸
올리브 기름과 바질릭으로만 양념한 까르빠쵸
모짜렐라와 검은 토마토, 서양고추를 잘게 썰어 얹은 까르빠쵸
로껫 한 줌과 잣, 빠르미쟈노 조각들을 얹은 까르빠쵸

mardi 23 octobre 2007

앙그르의 바이올린 (violon d'Ingres)

누운 오달리스크빠올로와 프란체스까 외에도 여러 대작을 남긴 앙그르 (Jean Dominique Ingres) 는 화가로 유명하지만, 그는 또한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는 평생 바이올린을 즐겨 연주했으며, 한동안은 아예 까삐똘 드 뚤루즈 국립 관현악단 (Orchestre national du Capitole de Toulouse) 의 단원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문에 불어에는 violon d'Ingres 라는 숙어가 생겼습니다. 이 말은 « 본업 외에 매우 열정을 가지고 좋아하는 일, 취미, 장기 » 라는 뜻으로 자주 사용되는 숙어입니다. 예를 들면,

- Tu as un violon d'Ingres ? = 너 앙그르의 바이올린 가지고 있니 ? = 너 취미가 뭐니 ?
- Mon violon d'Ingres est le jardinage = 내 앙그르의 바이올린은 [내 취미는] 정원가꾸기야.

물론 취미로 바이올린을 매우 잘 킨다면, Mon violon d'Ingres est le violon 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한가지만 잘하기도 힘든데, 앙그르 같은 사람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얄밉기도 하고... ^^

이 불어 표현에서 영감을 받아 만 레는 앙그르의 바이올린이라는 사진 작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Man Ray, Violon d'Ingres

자화상을 통해서 본 앙그르의 시대별 모습
Ingres, Autoportrait, 1804
Huile sur toile, 77 x 61 cm
Chantilly, musée Condé

Ingres, Autoportrait, 1835
Mine de plomb sur papier, 29,9 x 21,9 cm
Paris, musée du Louvre
Ingres, Autoportrait, 1859
Huile sur papier marouflé sur toile, 64,8 x 52 cm
Cambridge, Fogg Art Museum



Selon la lettre qu'Ingres adressa en 1855 à Émeran Forestié-Neveu :

« Sans être musicien, mon père, organisé comme il était, adorait la musique, chantait très bien avec une voix de ténor ; ce digne père m'apprit tout ce qu'il savait, même la musique, en me faisant apprendre à jouer du violon, et avec assez d'intelligence pour avoir été admis comme violon au grand théâtre de Toulouse où j'exécutais en public un concerto de Viotti avec succès. M. Lejeune, violon alors à Toulouse, ami de Rhode, me donnait des leçons. »

La lettre définitive, avec quelques variantes, est conservée aux Archives départementales de Tarn-et-Garonne (cote 2 E 611), et publiée par Henry LAPAUZE, dans Ingres, sa vie et son œuvre (1780-1867) d'après des documents inédits, Paris, Imprimerie Georges Petit, 1911, p. 9-11. Mais nous la citons d'après Georges VIGNES, Ingres, Paris, Citadelles, Mazenod, 1995, p. 17. Intéressante est aussi la note de Vignes à propos du concerto de Viotti susmentionné (note 3, p. 321) :

« Au cours de la dernière soirée musicale qu'il donna chez lui, en janvier 1867, Ingres, par une sorte de prémonition, exprima comme un adieu à la vie le plaisir qu'il aurait eu à réentendre ce concerto, à savoir le vingt-deuxième, en la mineur. Huit ans plus tôt, il aurait confié à Théophile Silvestre (SILVESTRE, 1855, p. 5) l'avoir joué « en 1793, à l'époque de la mort du roi ». Pour MERSON (p. 8), ce fut même à l'occasion d'une fête donnée pour célébrer l'événement ! La mémoire d'Ingres semble ici défaillante, car ses activités musicales au théâtre du Capitole ne sont pas prouvées avant 1794. »

Bibliographie citée par Vigne :

- Olivier MERSON, Ingres, sa vie et ses œuvres, Paris, Hetzel, s. d. [peu après la mort d'Ingres].

- Théophile SILVESTRE, Histoire des artistes vivants - Études d'après nature - Ingres, Paris, E. Blanchard, 1855 (rééedition 1926 sous le titre Les Artistes français, Paris, G. Crès).

Autre passage de VIGNE, Ingres, Paris, 1995, p. 24 :
« ... on constate la présence du jeune homme [Ingres] comme second violon dans l'orchestre du Capitole de Toulouse à partir de 1794. Ces prestations musicales lui permettaient-elles de subvenir en partie à ses besoins ? Le peu d'aisance de sa famille le laisserait supposer. [...] Malheureusement, on ignore pratiquement tout du détail de ces quelques années toulousaines. Où habitait-il ? Vivait-il vraiment avec son père ? Mystère. »

dimanche 21 octobre 2007

빠올로와 프란체스까 (Paolo et Francesca)

로당이 첫번째 빠올로와 프란체스까 (훗날 입맞춤으로 알려질) 를 조각하면서, 그들을 지옥을 떠도는 불쌍한 영혼들이 아니라, 입맞추고 있는 행복한 연인들로 표현한 것은 그만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신곡을 보면, 단떼의 요청에 못이겨 프란체스까 다 뽈렌따가, 빠올로와 그녀가 처음으로 입맞춤을 나눈 순간을 울먹이며 회상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 지옥 », 제 5 곡, 121-138 행). 프란체스까의 설명에 의하면, 두 사람은 렁쓸로와 그니에브르의 이야기를 함께 읽고 있었는데, 렁쓸로가 그니에브르에게 입맞추는 장면에서 빠올로도 프란체스까에게 입맞추었다는 것입니다.

로당 보다 훨씬 이전에 앙그르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역시 빠올로와 프란체스까를 표현하기 위해 바로 이 장면을 선택했습니다. 앙그르는 1814년과 1850년 사이에 최소한 일곱 편의 회화와 십여 편의 데쌍을 이 주제에 할애했습니다 (아래 사진들). 이 그림들은 언뜻 보면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단지 수정본이나 복사본으로 보기에는 색깔, 구도, 인물들의 자세, 표정 등에서 꽤 차이점들이 드러납니다 (1). 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엉제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는 빠올로와 프란체스까입니다.

앙그르, 빠올로와 프란체스까 (1819)
Huile sur toile, 48 x 39 cm
Musée des Beaux-Arts, Angers

이 그림은 앙그르의 다른 빠올로와 프란체스까들에 비해서 유난히 색채가 화려합니다. 프란체스까의 빨간색 치마, 빠올로의 파란색 멍또, 그의 노란색 셔츠와 신발. 두 주인공의 화사한 색깔은 어두운 뒷배경으로부터 칼을 뽑아 들고 등장하는 쟌초또와 더욱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리고 큰 오달리스크 (La Grande Odalisque) 의 허리처럼, 여기서 빠올로는 길게 늘어난 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앙그르는 매우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면서도, 선과 형태의 조화를 위해서 때로는 이러한 변형을 행하는데 거침이 없었다고 합니다 (2).

이 그림에서 또 한가지 주목할 것은 떨어지고 있는 책입니다. 이 그림 속에서 떨어지다 말고 공중에 멈춰 있는 책은 미술이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예술임을 증명하는 좋은 예로 때때로 인용되기도 합니다. 이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정말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듭니다. 1초 뒤면 책은 바닥에 떨어질테고, 쟌초또는 두 연인을 죽일텐데 말입니다. 앙그르의 다른 빠올로와 프란체스까들에서는 책이 항상 떨어지고 있지만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이 1814년판에서는 책이 아직 프란체스까의 손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Paolo et Francesca (1814)
Huile sur toile, 35 x 28 cm
Musée Condé, Chantilly

Paolo et Francesca (vers 1846 ?)
Huile sur toile, 35 x 28 cm
The Barber Institute, Birmingham
앙그르, 빠올로와 프란체스까 (1815년 경)
mine de plomb sur papier, 25 x 18,7 cm
Musée du Louvre, Paris


Paolo et Francesca (vers 1846)
Huile sur toile, 23,5 x 16,5 cm
Musée Bonnat, Bayonne

Paolo et Francesca (vers 1834)
Prototype des dernières répliques du thème, peintes dans les années 1850
Huile sur toile, 29 x 33 cm
The Hyde Collection, Glens Falls

(1) À ce propos, citons Georges VIGNE, Ingres, Paris, 1995, p. 8 : « La recherche maniaque de la perfection l'invita par ailleurs à reprendre perpétuellement les mêmes sujets et les mêmes formes [...] Comme de véritables idées fixes, ses anciennes compositions revenaient régulièrement sur le métier, afin de se voir améliorées ou partiellement réintroduites dans de nouveaux sujets. Ces habitudes, ces doutes ou ce perfectionnisme n'autorisent guère à parler d'une réelle évolution de style. »

(2)
Ibid., « on pourrait s'étonner que ce forcené du dessin, retravaillant inlassablement le même détail d'après nature pour en trouver la représentation la plus accomplie, ait littéralement truffé ses tableaux de surprenantes fautes anatomiques, déformations, compressions ou élongations. Encore faut-il préciser que ces apparentes erreurs ne sont jamais perceptibles au premier regard : les visiteurs du Louvre observent les tableaus d'Ingres sans jamais sourciller et repartent sans s'être aperçus des « monstres » qu'ils ont eus un instant devant les yeux. Doit-on croire que l'artiste était totalement inconsicent de ce qu'il faisait ? Bien au contraire ! Il agissait là en véritable peintre - c'est-à-dire en poète - et non en stupide geôlier du réel, réclamant pour l'art sa part d'idéalité. Ses tableaux obéissent avant tout à une parfaite harmonie interne où une géométrie souvent complexe gère entièrement le développement des rondeurs, la longueur de chaque oblique, la place du moindre objet. Lorsqu'un bras s'attache mal à l'épaule, lorsqu'une jambe paraît visiblement étrangère au corps qu'elle est censée supporter, la rigueur des axes de la composition leur apporte une justification, non plus vraiment anatomique, mais rythmique : chaque détail contribue à la cohésion générale et sa disparition entraînerait la ruine visuelle de tout l'ensemble. ».

samedi 20 octobre 2007

지옥의 문 (La Porte de l'Enfer)

생각하는 사람 (Le Penseur) 못지 않게 유명한 로당 (Auguste Rodin) 의 입맞춤 (Le Baiser) 은 바로 빠올로 말라떼스따와 프란체스까 다 뽈렌따의 사랑을 표현한 조각입니다. 원래는 지옥의 문 (La Porte de l'Enfer) 의 일부로 구상된 것인데, 세상 몰라라하고 입맞추고 있는 두 연인의 행복한 모습이 지옥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되어, 입맞춤지옥의 문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된 조각품이 되었습니다.

로당, 입맞춤 (청동)
빠리, 뛰일르리 정원, 오렁쥬리 앞
(왼쪽 사진의 뒷편에 오벨리스크)


로당, 입맞춤 (대리석)
빠리, 로당 박물관 실내.
로당, 빠올로와 프란체스까 (1880년경의 데쌍)

대신 로당은 지옥의 문에 새로운 빠올로와 프란체스까 (Paolo et Francesca) 를 새겼습니다. 새 빠올로와 프란체스까는 좀 더 단떼의 묘사에 적합하게, 지옥을 떠도는 유령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로당, 지옥의 문의 일부로서의 빠올로와 프란체스까 (청동)

로당, 독립된 형태의 빠올로와 프란체스까 (대리석).
지옥의 문빠올로와 프란체스까처럼 구체적으로 개인화된 인물들, 또는 그저, 앉아 있는 노인 (Vieillard assis), 우는 여자 (Femme pleurant), 떨어지는 남자 (Homme qui tombe) 등 막연하게 음울한 분위기와 관련된 인물들, 그리고 사랑 (Amour), 절망 (Désespoir), 고통 (Douleur) 같은 추상적인 개념 등등, 모두 100여점의 크고 작은 조각들로 구성된 거대한 기념비적 문입니다. 원래는 19세기 말에 건설될 계획이었던 빠리의 장식 예술 박물관 (Musée des arts décoratifs) 을 위해 국가로부터 주문된 것이었는데, 수많은 수정을 거치고도 로당은 끝내 이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겼고, 그 사이에 장식 예술 박물관이 루브르 궁으로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이 작품은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로당의 살아 생전에 지옥의 문은 오로지 단 한 번 밖에는 전시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세계에 모두 아홉 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프랑쓰에 세 점, 미국에 두 점, 일본에 두 점, 스위쓰에 한 점, 그리고 한국 (!) 에 한 점이 있습니다.

로당, 지옥의 문 (청동)
빠리, 로당 박물관 정원
(빠올로와 프란체스까는 중앙 아래에서 약간 왼쪽에)

지옥의 문 중앙 위 쪽, 세 그림자 (Les Ombres) 조금 밑에는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이 턱을 괴고 앉아 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이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단떼를 상징합니다. 원래는 시인 (Le Poète), 그 다음에는 생각하는 시인 (Le Poète penseur) 이라 불렸던 이 조각품은 지옥을 방문하고서 깊은 명상에 빠진 시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요.

로당, 생각하는 사람 (청동)
빠리, 로당 박물관 정원

mercredi 17 octobre 2007

프란체스까 다 리미니 (Francesca da Rimini)

polenta 는 보통명사로서 음식 이름이지만, 고유명사로서는 지명이자 인명이기도 합니다. 라벤나 (Ravenna) 를 1287년부터 1441년까지 다스렸던 가문 다 뽈렌따 (da Polenta) 는, 이름이 뜻하듯이, 근방의 작은 마을인 « 뽈렌따 (Polenta) 로부터 (da) »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다 뽈렌따 가문의 사람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마도 프란체스까일 것입니다. 유명하다고는 하나 그녀의 자세한 삶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는 젊은 나이에 리미니의 영주인 쟌초또 말라떼스따 (Gianciotto Malatesta di Rimini) 와 결혼해야 했으며 (1275), 그 때문에 프란체스까 다 리미니 (불어로는 Françoise de Rimini) 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역사학의 관습을 따르자면 프란체스까 다 뽈렌따라고 부르는게 더 정확하겠지만). 프란체스까는 나이 많고 절름발이였던 남편보다는 그의 동생이었던 빠올로 (Paolo Malatesta di Rimini) 와 사랑에 빠졌고, 이것을 목격한 쟌초또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두 사람을 한꺼번에 살해하였습니다 (1285).

이 어찌보면 « 별것 아닌 » 사건은 단떼 (Dante Alighieri) 가 신곡 (Divina Commedia) 에서 다룸으로써 일약 전설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각각 남편과 형을 배신한 프란체스까와 빠올로는 지옥에 가게 되었지만, 지옥에서나마 두 사람은 영원히 맺어지게 되었고, 비슷한 죄를 지은 다른 영혼들, 쎄미라미쓰, 디동, 끌레오빠트르, 엘렌, 빠리쓰, 아쉴, 트리스떵 같은 유명한 연인들과 함께, 지옥의 두번째 테를 떠돌게 됩니다. 이 모든 전설적인 연인들 중에서 단떼는 유난히 빠올로와 프란체스까의 고통에 극심한 슬픔을 느낍니다.

단떼 이후 이 이야기는 한동안 잊혀졌다가, 19세기부터 갑자기 많은 예술가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이딸리아의 작가 뺄리꼬 (Silvio Pellico) 와 단눈치오 (Gabriele D'Annunzio) 는 프란체스까 다 리미니라는 제목의 희곡을 썼으며 (각각 1815, 1901), 벨리니도니제띠와 함께 자주 일했던 로마니 (Felice Romani) 는 오뻬라 대본을 한 편 남겼습니다. 이 대본은 당대의 여러 « 이류 » 음악가들에 의해 오뻬라로 작곡되긴 했지만, 오늘날은 모두 잊혀졌습니다. 반면 챠이코프스키의 교향시 프란체스까 다 리미니 (1876) 는 현재도 자주 연주되는 인기있는 작품입니다. 또 챠이코프스키의 동생인 모데스트 챠이코프스키도 같은 주제로 짤막한 오뻬라 대본을 썼으며, 여기에 맞춰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마지막 오뻬라 프란체스까 다 리미니를 작곡하였습니다 (1905). 또 잔도나이 (Riccardo Zandonai) 의 가장 유명한 오뻬라이자 거의 유일하게 알려진 작품인 프란체스까 다 리미니 (1914) 는 단눈치오의 동명 희곡을 각색한 대본을 사용합니다.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의 화가들이 두 연인을 주제로 하여 그림을 그렸는데, 특히 앙그르는 빠올로와 프란체스까 (Paolo et Francesca) 라는 제목의 그림을 일곱 편 이상 남겼고, 로당 역시 빠올로와 프란체스까를 거대한 지옥의 문 (La Porte de l'Enfer) 속에 집어 넣기 위해 많은 궁리를 했습니다. (기타 빠올로와 프란체스까를 소재로 한 미술품 모음집)

samedi 13 octobre 2007

뽈렌따 (polenta)

베르가모에서는 베르가마스크꼼메디아 델라르떼 뿐 아니라 뽈렌따도 유래했습니다. 옥수수 가루를 물에 끓인 것에 불과한 뽈렌따는 사실 별 맛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딸리아 전역에서 (특히 북부에서) 즐겨 먹는 대표적인 대중 음식이 되었습니다. 뽈렌따를 요리하는 데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우선 기본적으로는 물에 오래도록 끓여야 합니다. 맛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 우유나 육수 등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어느 경우든 간에 오래 끓여야 하며, 또한 쉼없이 저어주어야 합니다. 쏘피아 로렌 (Sophia Loren) 은 « 맛있는 뽈렌따는 한 시간 반 동안의 팔젓기를 통해 얻어진다 » 고 했습니다. 물론 요즘 팔리는 뽈렌따들은 이미 한번 익혀진 것이라, 길게는 이십분, 짧게는 오분만 끓이면 되는 제품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뽈렌따들은 덩어리가 자주 생기는 단점이 있습니다.

가루 형태의 뽈렌따

이렇게 해서 걸죽하게 익혀진 뽈렌따는 그 자체로 먹기도 하고, 버섯, 햄, 치즈 등을 잘게 썰어 넣어 가미를 하기도 합니다. 또는 넓은 그릇에 펼쳐서 식히면, 어느 정도 굳어지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모양을 만들 수 있습니다 (네모, 세모, 마름모, 동그라미, 반달). 그래서 다시 프라이팬에 부치기도 하고 (마치 두부처럼), 오븐에 굽기도 합니다.

저는 뽈렌따를 먹는 일이 드문데, 필요할 때는 아예 다 만들어진 것을 삽니다. 여러 시도를 해 본 결과, 별 맛도 없는 뽈렌따를 위해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프랑쓰에서는 이딸리아만큼은 아니지만, 쉽게 여러 형태, 여러 종류, 여러 맛의 뽈렌따를 구할 수 있으며, 그 중에는 제법 먹을만한 것도 있습니다.

익혀서 식힌 후 자른 뽈렌따

이 완성된 상품을 이용해서 저는 주로 뽈렌따 빠스띠챠따 (polenta pasticciata = 뽈렌따 그라땅) 를 만듭니다. 이 음식은 다진 고기와 쌀라미에 당근, 쎌르리, 양파, 고추를 넣고 볶은 다음에, 토마토와 포도주와 향료를 넣고 끓인 후, 길고 얄팍하게 썰은 뽈렌따 (윗사진) 를 얹어 오븐에 구워낸 것입니다. 아, 마지막에 빠르미쟈노 치즈를 뿌리면, 더 노릇노릇하고 바삭한 뽈렌따를 얻을 수 있습니다.

뽈렌따 빠스띠챠따

참고로, 라띠나어 polenta 는 사실은 « 가루 » 라는 뜻에 불과한 말로, 옥수수가 유럽에 전해지기 전에는 주로 « 보릿가루 », 때로는 « 메밀가루 » 를 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지역 별로 다른 가루를 뜻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프랑쓰의 꼬르쓰 섬에서 뽈렌따는 « 밤가루 » 를 칭합니다.

jeudi 11 octobre 2007

꼼메디아 델라르떼 (commedia dell'arte)

베르가마스크 뿐 아니라 꼼메디아 델라르떼 (commedia dell'arte) 도 역시 베르가모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꼼메디아 델라르떼는 연극의 한 졍르이되, 정확하게 쓰여진 대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략적인 줄거리와 전체적인 틀만 가지고, 배우들의 즉흥연기로 구성됩니다. 꼼메디아 델라르떼의 배우들은 대사 뿐 아니라, 노래와 춤, 곡예와 무언극 등도 역시 상대방 배우와 관객의 반응에 따라 즉석에서 행할 줄 알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꼼메디아 델라르떼는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연기술, 말솜씨, 순발력, 다양한 재능이 핵심을 이루는 연극입니다. 명칭 속의 arte 라는 말도 « 예술 » 이라기 보다는 « 기술, 솜씨, 실력 » 등을 뜻하며, 전체적인 용어는 결국 « 전문 직업 배우들에 의해 행해진 희극 » 이라는 뜻입니다. 중세에는 직업 배우가 없거나 드물었는데 비해서, 1500 년 이후 꼼메디아 델라르떼가 널리 퍼지면서, 직업 연극단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즉흥성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관객은 물론 배우를 위해서도 꼼메디아 델라르떼에는 어느 정도 관습과 기준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꼼메디아 델라르떼에는 일정한 수의 정해진 인물들이 등장하며, 그들은 어느 작품이든지 간에 항상 같은 성격, 말투, 사회적 지위, 출신 지역, 외모 (옷차림과 가면) 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요소들이 많이 바뀌더라도 관객들은 쉽게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대략적인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꼼메디아 델라르떼의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인 아를레끼노 (Arlecchino)베르가모의 낮은 도시에서 태어난 가난한 시종으로, 순진하지만, 좀 멍청하고, 게으르며, 항상 먹을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는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있는데, 이것 역시 가난하다보니 여러 천조각으로 옷을 기워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André Derain, Arlequin et Pierrot (1924)
Musée de l'Orangerie, Paris

반면 브리겔라 (Brighella)베르가모의 높은 도시 출신으로, 역시 가난한 시종이지만 아를레끼노와는 달리 매우 꾀가 많고 돈을 밝힙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아를레끼노와 브리겔라 사이의 이러한 대조는 실제로 르네썽쓰 시대에 베르가모의 높은 도시 사람들은 보다 영악한 면이 있고, 낮은 도시 사람들은 더 순박한 것으로 통했던 데에서 유래했습니다. 또다른 유명한 인물인 빤딸로네 (Pantalone) 는 베네치아의 부유한 상인으로, 욕심 많은 구두쇠 노인입니다. 항상 젊은 여자들을 추근대다가 봉변을 당하고, 아를레끼노나 다른 시종들에게 놀림을 받습니다. 그의 이름은 pianta leone, 즉 « 사자를 심다 » 라는 표현에서 왔는데, 이것은 베네치아가 번성하면서 공화국의 상징인 날개달린 사자가 그려진 깃발이 도처에 심어진 것에 대한 풍자입니다. 빤딸로네는 항상 긴 바지를 입고 등장하기에, 그의 이름은 불어에서 아예 « 바지 » (pantalon) 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빤딸로네는 비둘기 (colomba) 처럼 귀여워하며 키운 양녀 꼴롬비나 (Colombina) 를 부유한 귀족 집안에 시집 보내려 하지만, 그녀는 오로지 아를레끼노만을 사랑합니다. 매우 활발하고 명랑하면서도, 현명하고 신중한 꼴롬비나는 번번이 지혜롭게 아버지의 계획을 무산시킵니다.

그외에도 나뽈리 민중을 대표하는 뿔치넬라 (Pulcinella), 밀라노 지방 농부인 메네기노 (Meneghino), 군인 스빠벤따 (Spaventa) 대장, 그의 조카인 허풍선이 스까라무챠 (Scaramuccia), 볼로냐 출신의 박사 발란쪼네 (Balanzone), 아를레끼노의 프랑쓰 친구인 삐에로 (Pierrot) 등등, 여러 인물들이 더 있습니다. 그리고 방금 묘사한 극히 기본적인 특징들은 시대와 나라에 따라 차차 발전하여, 때로는 보다 복합적인 성격을 갖기도 하고, 원래와는 조금 동떨어진 모습으로 변하기도 하였습니다. 꼼메디아 델라르떼는 유럽 전체에서 유행했었지만, 특히 프랑쓰와 이딸리아에서 16-18세기 동안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여기저기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꼼메디아 델라르떼의 인물들은 애초의 시작과는 달리 완전하게 쓰여진 연극 작품 속에도 종종 등장하며, 오뻬라에도 여러 인물들을 낳았고, 음악가들과 화가들에도 영감을 주었습니다. 꼼메디아 델라르떼는 또한 무언극의 출발점으로 여겨지며, 넓은 의미에서는 오늘날의 영화와 텔레비젼에도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mercredi 10 octobre 2007

베르가마스크 (bergamasque)

Bergamo 에 해당하는 불어 형용사는 bergamasque 입니다 (이딸리아어로는 bergamasco/a). « 베르가모의, 베르가모 사람의, 베르가모 언어의... » 또한 명사화 시켜서, « 베르가모 지방 언어, 베르가모 주민, 베르가모 출신 사람 » 이란 뜻도 되구요. 물론 사람을 칭할 때는 첫자를 대문자로 써야 합니다 : la Bergamasque = « 베르가모 여자 ».

여성명사이되 첫자를 소문자로 쓰면 (la bergamasque), « 베르가모에서 유래한 춤, 그 춤을 위한 음악, 노래 » 를 뜻합니다. 그런데 사실 베르가마스크를 정확히 정의내리기는 힘듭니다. 16-17세기에 유행했던 이 민속춤은 뚜렷하게 정해진 양식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중들 사이에서 즉흥적이고 자발적으로 추어졌던 것 같습니다. 음악 역시 매우 광범위하여, 처음에는 이 춤을 반주할 수만 있다면 어떤 종류든지 간에 베르가마스크 라 불렸습니다. 물론 대부분은 간단한 선율에, 빠른 2박자, 4박자 계열의 음악이었지만요. 또한 흔히 베르가모 지방 언어로 된 가사가 붙기도 했다고 합니다.

16세기말부터 베르가마스크는 기악 음악의 한 졍르로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는데, 그 특징은 역시 빠른 2박자, I-IV-V-I 화성진행의 반복, 그 위에 얹혀진 간단한 선율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특징들 중 그 어떤 것도 오로지 베르가마스크에만 고유하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베르가마스크는 흔히 모레스크 (mauresque) 니, 따렁뗄 (tarentelle) 이니, 쌀따렐로 (saltarello) 니, 그리고 심지어 샤꼰 (chaconne) 같은, 다른 춤곡과 자주 혼동됩니다.

많은 바로크 시대 작곡가들이 베르가마스크라는 제목을 가진 기타 (guitare) 와 륏 (luth) 음악을 썼지만, 프레스꼬발디 (Girolamo Frescobaldi) 정도를 제외하면 오늘날은 대부분 잊혀진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베르가마스크 라는 제목을 가진 음악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드뷔씨 (Claude Debussy) 의 베르가마스크 조곡 (Suite bergamasque, 1890/1905) 일 것입니다. 다만 이 작품은 베르가모 시와도, 춤과도, 음악 졍르와도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 이 음악은 드뷔씨가 베를렌 (Paul Verlaine) 의 시집 우아한 축제 (Les Fêtes galantes, 1869) 를 읽고서 그 느낌을 음악적으로 표현한 것일 따름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 달빛 » 의 한 구절로부터 이 조곡의 전체 제목이 유래했습니다.

베를렌의 시 « 달빛 (Clair de lune) »

Votre âme est un paysage choisi
Que vont charmant masques et bergamasques
Jouant du luth et dansant et quasi
Tristes sous leurs déguisements fantasques.

Tout en chantant sur le mode mineur
L’amour vainqueur et la vie opportune,
Ils n’ont pas l’air de croire à leur bonheur
Et leur chanson se mêle au clair de lune,

Au calme clair de lune triste et beau,
Qui fait rêver les oiseaux dans les arbres
Et sangloter d’extase les jets d’eau,
Les grands jets d’eau sveltes parmi les marbres.

첫 연 (strophe) 의 대충 번역 :
당신의 영혼은 선택된 경치
그 속으로 멋부리며 지나가는 가면과 베르가마스크의 행렬
을 연주하며 춤추며
화려한 변장 뒤에서 슬퍼하며.

이 시의 두번째 행에 bergamasque 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사실 이것조차도 베르가모 도시나 베르가마스크 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여기서 이 단어는 그 앞 단어 masque 와 닮은 발음을 반복하고, 두 줄 밑의 fantasque을 맞추기 위한 싯적 언어일 뿐, 그 실제 의미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입니다 (à ce propos, voir Parnasse). 여기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애초에는 베르가마스크 조곡의 일부로 « 가면 (Masque) » 이라는 악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 가면 » 은 분리되어 독립된 곡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또한 조곡의 세번째 악장은 다름아닌 매우 유명한 « 달빛 (Claire de lune) » 이지요. 역시 위의 시에서 그 제목이 비롯되었습니다.

드뷔씨의 베르가마스크 조곡 중 « 달빛 »

베를렌의 시집 우아한 축제는 드뷔씨 외에 또다른 프랑쓰 작곡가 갸브리엘 포레 (Gabriel Fauré) 에게도 영감을 주었습니다. 포레의 마스크와 베르가마스크 (Masques et Bergamasques, op. 112) 는 애초에는 르네 포슈와 (René Fauchois) 의 동명 제목을 가진 연극을 위한 부수 음악으로, 현재는 여덟 곡의 음악이 관현악 조곡처럼 묶여서 연주됩니다. 이 여덟 곡은 사실 모두 독립적인 작품들로, 그 중 일부는 이미 출판된 적이 있는 작품이며, 연극을 위해 새로 작곡된 음악들도 그들 사이에 어떤 밀접한 응집력을 갖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모두 우아하고 감미롭고 향수어린 춤곡들 (므뉘에, 갸봇, 빠반) 로, 연극의 주제, 그리고 연극의 기원이 된 베를렌의 시집의 주제와 잘 어울리는 음악들입니다. 이 중 여섯번째 곡은 역시 « 달빛 (Claire de lune) » 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위에서 인용된 베를렌의 시를 실제로 가사로 사용하는 성악곡입니다. 또한 여덟번째 곡 « 빠반 (Pavane) » 역시 매우 유명하지요.

베로닉 졍쓰 (Véronique Gens) 가 부르는 포레의 마스크와 베르가마스크 중 « 달빛 »

samedi 6 octobre 2007

베르가모 (Bergamo)

도니제띠의 출생지이자 사망지인 이딸리아의 베르가모는 매우 예쁜 도시입니다. 베르가모는 크게 두 구역으로 명확하게 구분되는데, 낮은 도시 (città bassa) 는 평지 위에 넓게 펼쳐져 있으며, 낮은 도시로부터 퓌니뀔레르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높은 도시 (città alta) 는 좁은 산등성이 위에 오밀조밀 응집되어 있습니다. 비교적 현대적인 모습을 갖춘 낮은 도시에도 의외의 매력이 있긴 하지만, 베르가모의 진짜 아름다움은 당연히 높은 도시에서 발견되지요. 여전히 성벽으로 둘러싸인 높은 도시에는 중세와 르네썽쓰 시대의 건물들로 가득하므로, 좁고 꼬불꼬불하고 울퉁불퉁한 돌길들을 거닐다 보면, 정말 다른 시대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도니제띠의 무덤이 있는 싼따 마리아 마죠레 대성당 (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 di Bergamo) 의 한 벽화.

싼따 마리아 마죠레 성당의 천장. 상대적으로 초라한 외부를 가진 이 성당의 내부는 휘황찬란한 바로크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싼따 마리아 마죠레의 측면과 꼴레오니 성당 (Cappella Colloni) 의 정면.

색깔돌을 사용한 꼴레오니 성당. 15세기에 베네치아를 위해 일했던 유명한 꼰도띠에로 (condottiero = 용병대장) 바르똘로메오 꼴레오니 (Bartolomeo Colleoni) 와 그의 딸 메데아 (Medea) 를 매장하기 위해 지은 꼴레오니 가문의 성당. 이 두 사람 외에 메데아가 사랑하던 새도 함께 묻혔다고 합니다.
빨라쪼 델라 라죠네. palazzo della ragione 라는 것은, 직역하면 « 이성, 판단의 궁전 » 이란 뜻으로, 사실은 중세 이딸리아 도시들에서 법원이나 시청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베르가모의 빨라쪼 델라 라죠네의 정면에는 사진에서 보이다시피 베네치아의 상징인 날개달린 사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베르가모는 15세기 말부터 18세기 말까지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은 덕에 베르가모는 크게 번영할 수 있었으며,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고 보존하는 데에도 베네치아의 역할이 컸습니다. 나뽈레옹의 침략으로 베르가모는 프랑쓰의 영토가 되었다가, 나뽈레옹의 퇴락 후에는 외스터라이히에 합병되었고, 1859년 이후로 이딸리아에 속하게 됩니다.

도시의 탑 (Torre civica) 또는 종탑 (Campanone).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이 종탑은 매일 22시마다 130번 울린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이 종소리를 신호로 높은 도시의 모든 문을 닫았습니다.
북서쪽 성벽 위. 높은 도시를 둘러싼 성벽은 여러 시대에 걸쳐 차차 건설되었지만,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은 베네치아의 지배 하에 16세기에 완성된 유적들입니다.

남쪽의 성벽으로부터 바라본 낮은 도시.
기타 기억이 가물가물한^^ 베르가모의 이곳저곳...

vendredi 5 octobre 2007

도니제띠 (Gaetano Donizetti)

가에따노 도니제띠에 대한 벨리니의 질투심은 물론 과장된 것이었지만, 허무맹랑하기만 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벨리니가 죽고 나자 도니제띠는 그야말로 유럽에서 제일가는 오뻬라 작곡가로 모든 명성과 인기와 부를 독차지하게 됩니다. 로씨니는 늙어 가고 있었고, 베르디는 아직 학생이었으며, 도니제띠의 동년배들 중에서 그와 견줄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은 벨리니 뿐이었던 것이지요. 벨리니가 퓌또에서 쓸쓸히 죽어가던 바로 그 순간 (1835년 9월 23일) 도니제띠는 나뽈리에서 루치아 디 람메르무어 (Lucia di Lammermoor) 를 발표하여 대성공을 거둡니다 (1835년 9월 26). 그 며칠 후 벨리니의 사망 소식을 들은 도니제띠는 상당히 슬퍼했다고 합니다. 그는 불운한 벨리니를 기억하기 위한 연미사곡 (Requiem à la mémoire de l'infortuné Bellini) 을 작곡하기도 했는데 (1835년 12월), 정작 이 음악은 한번도 연주되지 않다가, 1875년 도니제띠 자신의 유골을 베르가모의 싼따 마리아 마죠레 대성당으로 옮기는 예식을 위해서야 연주되었습니다.

그런데 도니제띠의 말기는 막연하게나마 벨리니의 삶과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수년에 걸쳐 빠리에 체류한 바 있던 도니제띠는 벨리니처럼 빠리에서 그의 마지막 오뻬라 동 쎄바스치앙 (Dom Sébastien) 을 완성합니다. 이 무렵 (1843년) 부터 그는 정신이상 증세를 자주 보이기 시작했는데, 결국 1845년 빠리에서 두뇌가 마비되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습니다. 벨리니의 경우처럼 그의 병도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데, 오늘날 전문가들은 젊은 시절 앓았던 매독의 후유증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가 실제로 매독에 감염되었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그가 평생 자주 앓았던 여러 병의 증세들, 그 뿐 아니라 그의 부인과 아이들에게서 드러났던 증상들을 볼 때도 매독이었을 확률이 많다고 합니다. 아무튼 도니제띠는 1846년초부터 이브리 (Ivry) 의 정신요양소에 수용됩니다. 이브리 역시 매우 황폐한 빠리 주변의 변두리 도시로서, 벨리니가 마지막 순간을 보냈던 퓌또를 생각치 않을 수 없습니다.

벨리니와 다른 점이라면, 도니제띠에게는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도니제띠를 고향인 베르가모로 데려 오고 싶어했지만, 프랑쓰 의사들은 힘든 여행을 이유로 퇴원을 거부했습니다. 이딸리아 최고의 작곡가가 한낱 빠리 변두리의 요양소에 감금되어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딸리아 전체는 크게 분노했지만, 프랑쓰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국제적인 명성의 작곡가가 빠리에서 죽기를 원했습니다. 프랑쓰 측에서는 심지어 경찰로 하여금 도니제띠를 치밀하게 감시하게 하였으며, 그 때문에 이 사건은 법정까지 가게 되고, 더 나아가 외교적인 줄다리기로 바뀝니다. 왜냐하면 당시 베르가모는 외스터라이히의 영토였으므로, 엄격히 말하면 도니제띠의 국적은 외스터라이히였던 것이지요. 게다가 도니제띠가 이성을 잃기 전 행했던 마지막 공식 직업은 빈의 궁정 지휘자였기 때문에, 빈 측에서는 당장 외스터라이히 시민을 풀어 놓으라고 프랑쓰에 엄포했습니다. 또, 가에따노의 동생이자 역시 음악가였던 쥬제뻬 도니제띠는 오또멍 제국의 황실 음악가로 일하고 있었기에, 프랑쓰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서 꽁스떵띠노쁠의 영향력도 이용하려 했습니다. 결국 나라들 사이에 공문서가 오가고, 대사가 파견되고 소환되는 등, 일련의 소란 끝에 도니제띠는 마침내 프랑쓰로부터 « 해방 » 될 수 있었습니다.

1847년 10월 6일, 베르가모에 도착한 도니제띠는 가족들과 친구들의 보살핌 속에서 육개월을 더 살지만,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이듬해 4월 8일 숨을 거둡니다. 1855년에 도니제띠의 두 형제, 쥬제뻬와 프란체스꼬는 베르가모의 싼따 마리아 마죠레 대성당에 가에따노를 위한 기념비를 세웁니다. 그리고 1875년에는 바로 이 기념비 밑으로 도니제띠의 유골이 이장되어 현재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싼따 마리아 마죠레 대성당 내에 세워진 도니제띠를 위한 기념비

기념비 밑, 도니제띠의 무덤

기념비 아랫단에 이딸리아 말로 쓰여져 있기를, « 종교 음악과 세속 음악을 많이 작곡한 트루바두르 가에따노 도니제띠에게 형제인 쥬제뻬와 프란체스꼬가 애정의 기억을 가지고 바친다 1855 ».

그리고 바닥에는 라띠나어로, « 가에따노 도니제띠, 여기 누워 있다 ».

mardi 2 octobre 2007

벨리니 (Vincenzo Bellini)

노르마의 작곡가 빈첸쪼 벨리니에 대해서 저는 개인적으로 별 관심이 없었는데, 알고보니 몇몇 놀라운 점들이 눈에 띕니다 :

1. 우선 매우 짧은 삶을 살았습니다. 1801년에 태어나서 1835년에 죽었으니 서른 네 해 밖에는 살지 못했네요. 어려서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벨리니는 신동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진짜 명성은 1827년 이후로 라 스깔라 (La Sacala) 를 위해 오뻬라들을 쓰면서 생겨났으니, 그의 본격적인 활동 기간은 채 십 년이 못됩니다. 이 짧은 기간동안 그는 국제적인 명성을 누렸습니다.

2. 매우 의외롭게도, 벨리니는 퓌또 (Puteaux) 에서 죽었습니다. 퓌또는 빠리 서쪽의 볼품없는 변두리 도시인데, 국제적으로 유명한 오뻬라 작곡가가 왜 젊은 나이에 여기에 와서 죽었을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알고 보니 별 특별한 이유는 없고, 벨리니의 친구였던 한 영국인 은행가가 퓌또에 있는 자기 별장을 빌려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퓌또에 별장을 사는 부유한 외국인이 있을까 몹시 의심스럽지만, 이백년 전에는 상황이 달랐나 봅니다. 사실 그 때 퓌또는 한적한 시골이었던 것이지요. 벨리니는 빠리 중심가에 자기 아파트 (appartement) 가 있긴 했지만 너무 좁아서 항상 불만이었고, 또 자주 장이 아픈 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휴양도 할 겸 퓌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여기서 그의 마지막 오뻬라 청교도들 (I Puritani) 을 작곡한 후 죽었습니다.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는데, 로씨니 (Rossini) 의 요청으로 해부를 해 본 결과 장에 구멍이 나 있었다고 합니다.

3. 벨리니는 그의 짧았던 일생 내내 피해망상증에 시달렸습니다. 특히 마지막 수년간은 로씨니와 도니제띠에 대한 질투로 괴로와 했다고 합니다. 그나마 선배격인 로씨니에 대해서는 덜했지만, 이딸리아에서나 프랑쓰에서나 그의 가장 큰 경쟁자였던 도니제띠를 향한 벨리니의 증오는 거의 광적이었다고 합니다. 설사 그의 작품이 도니제띠보다 더 좋은 평을 받고 더 많은 대중적 인기를 얻었을 때도 벨리니는 전세계가 자신을 모함하고 있다는 망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빠리 시절 동안 벨리니를 자주 만났던 하인리히 하이네 (Heinrich Heine) 는 벨리니를 « 구두를 신은 한숨 (un soupir en escarpins) » 이라고 묘사했습니다. 한숨 쉬느라고 바빠서 벨리니는 결국 인기와 명예를 별로 행복하게 누리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정확한 이유야 알 수 없지만, 그의 장에 구멍이 난 게 정신적인 고민과 완전히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Moralité = Vivons heureux !

Portrait de Bellini, attribué à Giuseppe Cammarano, vers 1826.
Naples, Museo di San Martino

lundi 1 octobre 2007

노르마 (Norma)

이딸리아 작곡가 빈첸쪼 벨리니 (Vincenzo Bellini) 의 대표작인 노르마아스떼릭쓰 만화와 꽤 연관된 주제를 가진 오뻬라입니다. 펠리체 로마니 (Felice Romani) 의 대본에는 정확한 연도와 장소가 명시되어 있지 않고, 단지 « 골 지방의 성스러운 숲 (nelle Gallie, nella foresta sacra) » 이라고만 되어 있지만, 내용을 보면 로마의 골 정복이 이루어진지 얼마 안된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략 기원전 50년 무렵 (아스떼릭쓰와 같은 시대) 이라고 볼 수 있으며, 오뻬라의 주인공들도 만화 속 주인공들처럼 모두 로마에 대한 적대심으로 똘똘 뭉쳐있습니다. 한 여자 만이 예외인데, 바로 주인공인 노르마입니다. 여자 드뤼이드 (femme druide ou druidesse) 인 노르마는 순결을 맹세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인 뽈리오네 (Pollione) 를 사랑하여 몰래 두 아이까지 두었으므로, 골인들과 로마인들의 전쟁을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뽈리오네는 더 젊은 여자 아달지자 (Adalgisa) 와 새로 사랑에 빠져 노르마와 아이들을 버리고 로마로 돌아가려 합니다. 이에 크게 분노한 노르마는 뽈리오네는 물론 아이들마저 죽이려 하지만, 결국은 골인들 앞에서 자신이 동족과 종교를 이중으로 배신했음을 고백한 후, 스스로 제물이 되어 불길 속에 몸을 던집니다.

물론, 대부분의 낭만주의 오뻬라들이 그러하듯, 노르마에서 골은 그저 이국적인 색채를 주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지요. 따라서 모순들과 피상적인 암시들로 가득합니다. 예를 들어 오뻬라의 첫 장면은 드뤼이드들이 황금낫으로 기 (gui) 를 따는 예식으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아스떼릭쓰 만화에도 자주 등장하지만, 골 종교의 가장 잘 알려진 측면이지요. 또 오뻬라의 마지막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나, 달을 향한 기도 (유명한 아리아 « Casta diva ») 등도 대표적인 끌리셰들입니다.

황금낫과 기를 손에 들고 메니르 기념물 앞에 서 있는 여자 드뤼이드 (La Druidesse). 19세기 화가 라 로슈 (La Roche) 의 그림.

1831년 밀라노 초연에서 아달지자를, 1835년 빠리 초연에서 노르마를 노래한 쥴리아 그리지 (Giulia Grisi)

한편 노르마의 역할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상당히 모호합니다. 오뻬라 대본에서 그녀는 때로는 여자 드뤼이드 (druidessa) 라 칭해지고, 때로는 예언녀 (veggente) 라 불리는데, 쎌트 종교에서 이 둘은 서로 다른 역할, 다른 계층에 속했습니다. 그리고 드뤼이드라고 해서 반드시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은 없었고, 지역마다, 부족마다, 조금씩 달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드뤼이드가 순결을 지켜야 한다면, 어째서 노르마만 지켜야하고 그녀의 아버지인 오로베조 (Oroveso) 는 지키지 않았는지 궁금해집니다. 왜냐면 오로베조야말로 « 드뤼이드들의 우두머리 (capo dei druidi) » 인 것으로 명시되니까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진짜 우두머리는 마치 노르마인 것으로 그려집니다. 모두들 노르마의 한마디에 부들부들 떨고, 노르마가 전쟁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리며, 기를 따는 것도, 희생 예식을 집전하는 것도 노르마입니다.

여자 드뤼이드인 것으로 보이는 나무 조각 (기원후 1세기). 프랑쓰 중부 샤말리에르 (Chamalière, Puy-de-Dôme) 에서 발견.

또한 프로꼰쑬인 뽈리오네가 노르마와, 그리고 뒤이어 아달지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도 사실 좀 억지스럽습니다. 로마가 파견한 프로꼰쑬 (proconsul) 은 골 전체를 다스리는 매우 높은 직책 (오늘날의 대통령에 비할 수 있는) 으로서, 혼자서 밤에 숲 속을 거닐며 일개 식민 부족의 드뤼이드와 몰래 사랑을 나누는 것은 거의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뽈리오네 (프랑꼬 꼬렐리) 와 노르마 (마리아 꺌라쓰).
제피렐리의 연출. 1964년 빠리 오뻬라.

물론 이 모든 것은 로마니 혼자의 책임이라기 보다는 오뻬라의 원작이었던 알렉썽드르 쑤메 (Alexandre Soumet) 의 운문 희곡, 노르마 또는 유아살인 (Norma ou l'infanticide) 에서 이미 설정되었던 상황들이었지요. 중요한 차이점이라면, 원작에서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노르마가 실제로 아이들을 살해합니다. 즉, 원작에서는 노르마의 분노와 절망이 훨씬 더 극단적이고, 골인들과 오로베조의 태도도 훨씬 더 격렬하며, 숲 속에 귀신과 유령이 난무합니다. 그나마 로마니의 각색본이 보다 절제되고 이성적인 셈입니다.

전형적인 19세기 초반 이딸리아 오뻬라인 노르마는 음악적으로도 큰 독창성은 별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비록 잘 작곡된 음악이고, 나름대로 아름다운 대목들이 여기저기 있긴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눈을 쥐어짜도, 쇼빵이 노르마를 보고서 흘렸다는 눈물은 나오지 않네요. 하지만 골을, 그리고 더 넓게는 쎌트 문화를 소재로 한 예술작품들이 매우 드물다는 점에서 노르마는 흥미를 가져볼 수 있는 오뻬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