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anche 31 août 2008

Victimae paschali laudes

Victimae paschali laudes (Louanges à la victime pascale)
Attribuée à Wipo de Bourgogne (mort vers 1050), cette admirable séquence est une des plus anciennes. De plus, elle est encore en usage aujourd'hui, faisant partie des cinq séquences autorisées à la liturgie après le Concile de Trente. Comme on peut le deviner, « À la victime pascale » est chantée pour la messe de Pâques.

Son schéma musical est de A - BB - CC - D. Son schéma textuel ne correspond pas à celui de la mélodie. Le poème n'a pas de rimes régulières. De type ancien, sa structure n'est pas encore dans la norme d'Adam de Saint-Victor, qui est beaucoup plus régulière et plus longue. Sa mélodie fut reprise par plusieurs compositeurs de différentes époques.

samedi 30 août 2008

부속가 (séquence)

부속가는 몇몇 특별한 날의 미사에서만 노래되는 단선율 평성가 (plain-chant) 로, 미사의 다른 문구들과는 달리 운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음악학 저술들에서는 « 부속가 », « 속송 », « 세쿠엔치아 », « 시퀀스 » 등 다양한 용어들을 사용해 왔는데, 한국 천주교의 공식 명칭은 « 부속가 » 입니다. « 부속가 » 는 상당히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말은 라띠나어 sequentia 나 불어 séquence 의 원뜻인 « 연속, 계속 » 을 포함하고 있는 동시에 그 기원까지 암시해 줍니다. 즉 부속가는 애초에 복음환호송에 « 부속 » 되어 있던 노래로서, 그 뒤를 « 계속 이어 » 불려졌던 것입니다. 현재는 부속가가 불려지는 일도 극히 드물지만, 불려질 때는 반대로 복음환호송 앞에 불려집니다. (1)

복음환호송 (alleluia) 은 말그대로 복음을 듣게 되는 것이 너무 기뻐서 환호하는 노래이기 때문에, 옛부터 매우 길고 화려한 선율을 가진 음악이었습니다. 특히 그 후렴구의 가사는 알-렐-루-야, 단지 네 음절 뿐인데, 음악에는 멜리슴 (mélisme) 이 잔뜩 들어가서, « 알. 렐. 루. 야. » 라고 노래되는 것이 아니라, « 알레에에에에에에--------- 루우우우우우우---- 야아아아아아아아------------- » 하는 식으로, 모음을 길게 늘여서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나치게 길어지다보니 사람들이 음악을 외우기 힘들어 하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옛날에는 악보가 아예 없거나, 있어도 정확한 높이와 리듬을 표시하지 못했으므로, 가수들은 흔히 음악을 통째로 외워야 했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길게 모음으로 노래되는 부분에 새로운 가사를 붙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랫말과 함께 외우면 그래도 좀 더 기억에 도움이 되니까요.

이렇게 해서 태어난 부속가 중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쌍-걀 (Saint-Gall, 현재 스위쓰령) 수도원의 수사였던 놋께르 발불루쓰 (Notker Balbulus = 말더듬이 놋께르) 가 남긴 Liber hymnorum (= 찬미가 책, 9세기 말) 에 담겨 있는 38 편의 부속가입니다. 이 책에는 서문이 함께 실려 있는데, 이 서문에서 놋께르는 방금 제가 위에서 한 이야기, 즉 긴 선율들을 외우기가 너무 힘들었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이 긴 선율들을 자신의 « 불안정한 작은 머리 » 속에 가둘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쥐미에쥬에서 온 한 수사가 자기네 수도원에서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답니다. 쥐미에쥬 (Jumièges) 는 빠리에서 북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노르멍디 지방에 위치한 수도원으로, 중세에는 매우 중요한 수도원 중의 하나였으나, 현재는 폐허만이 남아 있습니다. 아무튼 놋께르의 서문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비록 실제로 남아 있는 작품은 없으나, 부속가의 기원지가 프랑쓰 북부라는 사실입니다.

이후 부속가들은 곧 복음환호송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발전을 했습니다. 사실 초기 부속가들을 보아도 알려져 있는 복음환호송들의 선율과 그다지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부속가가 복음환호송에서부터 유래했다는 이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부속가는 초기의 형태와는 달리 점점 더 규칙적인 운율과 길이를 가진 시의 모습으로 변해갔으며, 따라서 음악도 여기에 맞춰 새로 작곡되었습니다. 부속가의 가장 완성된 형태는 12세기 후반, 아덩 드 쌍-빅또르 (Adam de Saint-Victor) 에 의해 달성되었습니다. 빠리의 성녀 쥰비에브 산 위에 있던 성 빅또르 수도원의 수사였던 아덩이 확립시킨 부속가의 구조는, 여러 연 (최소 십 연) 으로 구성되는 상당히 긴 노래이며, 첫 연과 마지막 연을 제외하면 중간의 연들은 모두 정확하게 둘로 나뉩니다. 이 각각의 반은 똑같은 음절수와 똑같은 리듬, 똑같은 각운 (rime) 을 가지고 있으며, 똑같은 선율에 맞춰 불립니다. 처음과 마지막 연을 빼면 모든 연이 같은 형식으로 만들어졌으므로, 매 연마다 같은 선율을 반복하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각 연마다 새로운 선율이 나와 두번씩 반복됩니다. 요약하면, A - BB - CC- DD - EE - ... - Z.

물론 초기의 부속가들은 이 틀에 잘 들어맞지 않고, 후기 부속가들 중에도 이 틀에서 약간 벗어나거나, 반복을 다시 반복하는 특이한 부속가들도 있습니다. 분노의 날 (Dies irae, 13세기) 이 그러한 예의 하나로, 이 노래는 [AA - BB - CC] - [AA - BB - CC] - [AA - BB - C - D] 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덩 드 쌍-빅또르 이후로는 사실상 모든 부속가들이 아덩의 규범을 기본으로 따릅니다.

부속가는 중세는 물론, 르네썽쓰 초기까지 유럽에서 엄청난 인기를 모았습니다. 그 수는 거의 오천여곡에 달했다고 하지요. 하지만 미사 음악이 지나치게 화려해지자 트렌또 공의회 (Concile de Trente, 1545-1563) 에서는 단 네 곡을 제외한 모든 부속가들을 전례에서 금지시키기로 하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종교 개혁을 겪고 나서 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검토하기 위해 소집된 트렌또 공의회는 음악에 대해서도 많은 중요한 지침을 내렸는데, 기본 노선은 « 쓸데 없이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을 배제한다 » 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1. 부활절 미사를 위한 Victimae Paschali laudes (부활절의 제물에게 찬양을)
  2. 성신강림절 미사 (부활절로부터 50일) 를 위한 Veni, Sancte Spiritu (오소서, 성신이여)
  3. 성체성혈 축일 (부활절로부터 60일) 을 위한 Lauda, Sion, Salvatorem (씨옹, 구세주를 찬양하거라)
  4. 그리고 위령의 날 (11월 2일) 을 비롯하여 기타 위령 또는 장례 미사를 위한 Dies irae (분노의 날)

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다 1727년에 성모통고일 (9월 15일) 을 위한 Stabat Mater dolorosa (고통스런 어머니가 서있었다) 가 뒤늦게 첨가되었습니다. 현재는 그나마도 처음 둘 만이 의무입니다.

부속가는 오늘날 많이 잊혀졌지만, 과거를 통해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몇몇 새로운 음악 졍르 (estampie, estampida, lai) 를 낳았으며, 악구 전체를 그대로 다시 한번 반복하는 작곡 기법 자체를 칭하는 말로도 굳어질 만큼, 음악사에 여러 흔적을 남겼습니다.

---------------------------
(1) Mais selon Nancy van Deusen, le terme sequentia proviendrait de sa position avant l'évangile dans la messe : « sequentia is given, designating position, a title derived from the piece's function before the Evangelium, which begins, for example, « sequentia sancti evangelii secundum Matthaeum » [...] Sequentia as a rubric is found exclusively in the position before the Evangelium (N. van Deusen, « Polymelodic Sequences and a « Second Epoch » of Sequence Composition », in Musicologie médiévale. Notations et Séquences. Actes de la Table ronde du CNRS à l'Institut de Recherche et d'Histoire des Textes, 6-7 septembre 1982, édité par Michel Huglo, Paris, Champion, 1987 : 213). Cette explication me paraît peu convaincante voire complètement erronée. Pourquoi appellerait-on une pièce suite alors qu'elle est devant ? Et surtout, on trouve la même indication sequentia sancti evangelii... dans toutes les messes, c'est-à-dire dans toutes celles où la séquence n'est pas comprise.

mercredi 27 août 2008

위령미사곡 (requiem)

미사 중 특별히 죽은 사람들을 위한 미사를 위령미사 (missa pro defunctis = messe pour les défunts) 라 하고, 여기에 붙인 음악을 흔히 requiem 이라고 합니다. requiem 이라는 말은 라띠나어로 « 휴식 » 을 뜻하는 단어 requies 의 목적격 형태로, 옛날에는 위령미사의 입당송 (introït) 이 반드시 Requiem æternam dona eis (그들에게 영원한 휴식을 주소서) 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2차 바띠까노 공의회 (1962-65) 이후로는 이 의무 규정이 사라졌지만, 위령미사를 위한 음악은 이미 하나의 졍르로 굳어졌기에, 관습상 계속 requiem 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미사 전체를 보면, 위령미사는 방금 말한 입당송을 비롯하여 몇몇 고유문에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기도가 들어가는 점을 제외하면, 사실 보통 미사와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오히려 음악에서 상당히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보통 미사를 위한 음악은 단지 통상문만을 다루는데 비해, 위령미사 음악은 고유문도 다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고유문들에 죽은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들어있으니까요. 다성 미사 음악이 발달한 후로, 미사 통상문과 고유문 모두에 음악을 붙이는 일은 위령미사곡들을 제외하면 극히 드뭅니다. 하지만 위령미사곡은 여러 고유문 악장이 포함되는 대신, « 대영광송 » 과 « 신앙고백 » 처럼 영광과 환희를 노래하는 통상문 악장들은 빠집니다. 따라서 위령미사곡과 일반 미사곡은 악장의 수와 구성, 형식 등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위령미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하나는 보통 미사에는 없는 분노의 날 (Dies irae) 이라는 부속가가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부속가 (sequentia = séquence) 는 몇몇 특별한 날에만 노래되는 기도문으로서, 미사 속의 다른 기도문들과 달리 시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즉 고유한 리듬을 가지고 있으며, 쌍을 이루는 각운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aa - bb - cc - dd...) , 문학적으로도 상당히 다듬어진 내용을 담고 있으며, 여러 연이 반복되는 비교적 긴 노래입니다. 중세와 르네썽쓰 시대에는 수천 곡의 화려한 부속가가 유행을 했었는데, 트렌또 공의회 (1545-1563) 에서 오로지 네 개만 남기고 모두 금지시켰습니다. 분노의 날은 그 넷 중 하나로 전통적으로 또마조 디 첼라노 (Tommaso di Celano) 가 13세기에 작사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16세기까지는 분노의 날이 모든 위령미사곡에 꼭 포함되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최초의 다성 레퀴엠으로 간주되는 기욤 뒤파이나 졍 오께겜의 위령미사음악에는 « 분노의 날 » 악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께겜의 제자 엉뜨완 브뤼멜 (Antoine Brumel) 이후로 « 분노의 날 » 은 점점 더 위령미사를 작곡하는 작곡가들이 가장 중점을 두는 악장이 되어 갔습니다. 특히 고전과 낭만 시대 작곡가들이 « 분노의 날 » 을 통해 자신의 기량을 한껏 드러내려는 시도를 많이 했지요

하지만 현대로 오면서 보통 미사 음악과 마찬가지로 위령미사곡의 형식적 구속이 많이 느슨해졌습니다. 이미 1868년에 브람쓰는 미사의 라띠나어 기도문이 아닌 독어판 성서에서 자유롭게 발췌한 문장들을 가사로 삼아 하나의 독일 레퀴엠 (Ein deutsches Requiem = Un requiem allemand, op. 45) 을 지었습니다. 약 백 년 뒤에 (1961) 브리튼이 작곡한 전쟁 레퀴엠 (War Requiem, op. 66) 역시 비슷한 예로, 여기서는 전통 위령미사에 사용되는 라띠나어 기도문과 윌프레드 오웬 (Wilfred Owen) 의 영어 시가 함께 사용됩니다. 결국 위령미사곡 역시 보통 미사곡처럼, 실제 미사 때에 사용하는 음악이라기 보다는, 순수 연주/감상용 음악이 되었습니다.

미사 음악 (musique de messe)

미사를 구성하는 기도문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 미사 통상문 (ordinaire) 과 미사 고유문 (propre). 미사 고유문이란 말그대로 매 미사마다 고유한 (propre), 즉 매번 달라지는 기도문을 말하는 것으로, 그 중 특히 노래로 불려지는 대표적인 예들은 « 입당송 », « 화답송 (graduel) », « 복음환호송 (alleluia) », « 부속가 (séquence) », « 봉헌송 », « 영성체송 » 등입니다.

반대로 미사 통상문은 일반적으로 모든 미사에 포함되어 있는 공통된 부분들로, « 자비송 (Kyrie) », « 대영광송 (Gloria) », « 신앙고백 (Credo) », « 거룩하시도다 (Sanctus) », « 하느님의 어린양 (Agnus Dei) » 등을 말하며, 서양 음악에서 미사라고 하면 바로 이 기도문들에 붙인 음악을 말할 때가 많습니다. 많은 미사곡들이 이 다섯 악장으로 구성되지만, 여기에 « 미사가 끝났으니 (Ite, missa est) » 가 첨가되는 일이 매우 흔하고, « 거룩하시도다 » 의 마지막 두 행이 « 주님의 이름으로 (Benedictus) » 라는 독립된 악장으로 구별되기도 합니다. 반면 평일 미사를 위한 짧은 미사곡에서는 « 대영광송 » 이나 « 신앙고백 » 이 생략되는 경우가 잦으며, 특히 사순절과 대림절 동안은 모든 미사에서 « 대영광송 » 이 반드시 생략됩니다. 그리고 « 대영광송 » 이 생략된 미사에서는 « 미사가 끝났으니 » 도 함께 사라지며, 대신 « 하느님을 축복합시다 (Benedicamus) » 로 대치됩니다. 따라서 미사곡마다 조금씩 차이가 보일 수는 있으나,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작품이 위에서 언급한 다섯 개의 미사 통상문을 기본으로 삼습니다.

음악적으로 이러한 구별이 확립된 시기는 대략 14세기입니다. 그 전에는 통상문과 고유문이 모두 단선율 평성가 (plain-chant) 로 불려지다가, 고유문들이 먼저 다성 음악으로 작곡되더니, 점차 작곡가들의 관심이 거의 통상문에만 집중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상 최초로 미사 통상문 모두 (다섯 기본 기도문 + « 미사가 끝났으니 ») 가 다성으로 작곡된 미사곡은 뚜르네 미사 (Messe de Tournai) 라고 부르는 작품입니다. 약 1300년 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음악은 작곡가를 알 수 없는 대신, 프랑쓰 북부 뚜르네라는 도시의 주교좌 성당에서 발견되었기에 이런 이름으로 불립니다 (뚜르네는 현재는 벨직령). 뚜르네 미사는 다성 미사로서 가장 오래된 음악이긴 하지만 과연 이 미사를 구성하는 여섯 개의 악장이 단 한 사람의 작품인지는 불확실합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뚜르네 미사는 여러 작곡가의 작품을 한 데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즉 A의 « 자비송 », B의 « 대영광송 », C의 « 신앙고백 »... 비록 모든 악장이 3성부를 유지하고는 있으나, 그 양식은 한 사람의 솜씨로 보기에는 너무 차이가 많습니다.

쏘르본 미사 (Messe de Sorbonne), 뚤루즈 미사 (Messe de Toulouse), 그리고 바르셀로나 미사 (Messe de Barcelone) 도 모두 비슷한 특징을 공유하는 작품들입니다. 셋 다 뚜르네 미사보다 몇 년 뒤에, 하지만 모두 14세기 초반에 작곡된 다성 미사곡으로, 편의상 발견된 장소의 이름을 띠고 있습니다. 이들 역시 작곡가를 알 수 없으며, 과연 각각 한 명의 개별 작곡가의 작품인지가 큰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세 미사도 서로 이질적인 특징을 가진 악장들이 혼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뚜르네 미사와는 달리 미사 통상문 전체를 다 포함하고 있지도 않는 등, 짜집기한 흔적이 쉽게 눈에 보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다성 음악 미사는 기욤 드 마쇼 (Guillaume de Machaut) 의 노트르-담 미사 (Messe de Notre-Dame) 로 보는 견해도 많습니다. 랑쓰의 노트르-담 주교좌 성당에서 연주되기 위해 작곡된 이 작품이야말로 전체가 단 한 명의 작곡가에 쓰여진 첫 미사 음악입니다. 하지만 이 미사마저도 그 구상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쟁이 있습니다. 과연 마쇼가 처음부터 이 미사를 단 하나의 작품으로 계획한 것일까요 ? 연구가 거듭될수록 점점 더 많은 마쇼 전문가들이 아니라고 보는 추세입니다. 즉 각각의 악장이 여러 시기에 걸쳐 독립적으로 작곡되었다가, 1362-63년 경 성모를 위한 미사라는 이름 하에 모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록 중세 최대의 작곡가에 의해 작곡되었다고는 하나, 노트르-담 미사뚜르네 미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정말 현대식 개념으로서의 미사, 즉 한 명의 작곡가가 일관된 통찰력을 가지고 미사 통상문 전체를 위해 작곡한 음악 중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영국 작곡가 라이오넬 파워의 (Lionel Power) 작품입니다. 알마 레뎀또리쓰 마떼르 미사 (Missa super Alma Redemptoris Mater) 라고 부르는 이 작품은 15세기 초에 작곡된 것으로 추정되며, 미사의 모든 악장이 유명한 평성가 Alma Redemptoris Mater (= 구세주를 기른 어머니) 의 선율을 기본으로 삼아 작곡되었기 때문에, 전체가 응집력 있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후로 르네썽쓰 시대를 거치면서, 기욤 뒤파이 (Guillaume Dufay), 졍 오께겜 (Jean Ockeghem), 죠스깡 데프레 (Josquin Desprez), 롤렁 드 라쒸쓰 (Roland de Lassus), 죠반니 다 빨레스트리나 (Giovanni da Palestrina) 같은 거장들이 미사 전체를 하나의 통일된 음악적 소재에 기반하여 작곡하는 양식을 굳혔습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로는 점점 미사 음악의 형식적 구속이 허술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작곡가들은 점점 더 다양한 형식을 실험했고, 그러면서 « 대영광송 » 이나 « 신앙고백 » 같이 긴 기도문은 여러 개의 소악장으로 잘게잘게 나눠지기도 했고, 반대로 « 미사가 끝났으니 » 나 « 하느님을 축복합시다 » 같이 극히 짧은 기도문은 많은 반복과 기악 구절의 첨가 등으로 더 길어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미사 음악은 더이상 실제 미사를 위한 음악이 아닌, 순전히 연주용 예술 작품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설사 자기 종교가 천주교가 아닌 작곡가들도 대부분 한두편의 미사를 남겼습니다. 그저 음악의 한 졍르가 됐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이런 미사곡들은 정말 아름답긴 하지만, 불행히도 동네 성당에서 일반 신자들이 참여하는 보통 미사 때에는 부르거나 듣기가 힘듭니다. 고도로 훈련된 합창단과 대규모 관현악 반주를 필요로 할 때가 많고, 길이도 무척 길기 때문입니다. 정작 현대의 미사에서 음악을 사용하는 방법은 오히려 14세기 이전으로 돌아간 듯 합니다. 그때그때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음악들, 서로 다른 양식과 서로 다른 작곡가,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진 노래들을 여기저기서 모아서 짜집기로 부르니까요.

samedi 23 août 2008

graduel « 화답송 »

« 층계, 계단 » 을 뜻하는 라띠나어 gradusgradus ad Parnassum 외에 또하나의 음악 용어 graduel 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répons granduel 이나, 흔히 줄여서 부르는 graduel 이라고만 하는 이 말은 꼭 음악 용어라기 보다는, 미사의 일부로써, 제 1 독서 뒤에 노래되는 응답송을 칭합니다. 이 기도문이 이런 이름을 갖게 된 데는 약간의 논쟁이 있긴 하지만, 애초에는 제단이나 독서대로 올라가는 계단에 서서 노래불렀기 때문인 것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도 옛날에는 « 층계송 » 이라고 했었는데, 한동안 « 응송 » 이라고도 부르다가, 얼마전부터는 « 화답송 » 이라고 한답니다.

응송, 응답송, 화답송 같은 말은 불어 répons, 라띠나어 responsorium 등을 우리말로 옮긴 것으로, 노래를 부르는 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즉 한 명의 독창자가 한 구절 (V) 을 노래하면, 나머지 신자 모두가 여기에 대한 « 답 » 으로 짧은 후렴구 (R) 를 노래하는 것이지요. 그러고나면 다시 독창자가 새로운 가사와 새로운 선율을 노래하고, 신자들은 다시 후렴구를 부르는 식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결국 아래와 같은 형식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R) - V1 - R- V2 - R - V3 - R - V4 - R, etc.

R 는 모두 합창이고 항상 똑같은 선율과 가사인 대신, V 는 모두 독창이고 새로운 가사이긴 하지만 반드시 선율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는 독창자가 가사의 리듬과 길이에 따라 자유롭게 장식과 멜리슴 (mélisme) 을 넣어가며 부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천주교의 미사나 성무일도에는 이렇게 주고 받는 응답 방식으로 부르는 노래들이 여럿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그라뒤엘인 것입니다.

현재는 그라뒤엘 또는 화답송을 노래로 부르는 일은 드뭅니다. 하지만 사회자 한 명이 기도문의 여러 구절을 읽는 동안 신자들이 중간중간 후렴구를 반복하는 그 낭독 방식은 여전히 음악적 기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jeudi 21 août 2008

빠르나쏘쓰로 오르는 계단 (gradus ad Parnassum)

문화와 예술, 학문과 지식의 보금자리라 믿어지는 빠르나쏘쓰 산은 빠리의 한 구역프랑쓰의 문학 운동에 그 이름을 주었을 뿐 아니라 gradus ad Parnassum [그라두쓰 아드 빠르나쑴] 이라는 라띠나어 표현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직역하면 « 빠르나쏘쓰로 오르는 계단 », 의역하면 « 예술의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 밟아야 할 체계적인 과정 » 을 뜻하는 이 표현은 사실상 교본, 사전, 자습서, 연습문제 같은 책의 제목으로 자주 쓰였고, 더 나아가 그런 부류의 책을 포괄하는 일반 용어가 되었습니다. 불어에서도 gradus ad Parnassum [그라뒤쓰 아드 빠르나썸] 또는 그저 gradus [그라뒤쓰] 라고 하면, 특별히 라띠나어 시 작법을 설명한 책과 라띠나어 운율 사전 등을 칭합니다.

시 외에도 이 표현은 종종 음악 분야에서도 쓰였습니다. 특히 유명한 저술 하나는 외스터라이히의 작곡가 푹쓰 (Johann Joseph Fux) 가 지은 Gradus ad Parnassum 입니다 (1725). 스승과 제자의 대화 형식으로 쓰여진 이 대위법 설명서는 많은 유명 작곡가들의 교본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끌레멘띠 (Muzio Clementi) 의 Gradus ad Parnassum (1817) 은 글로된 저술이 아니라, 피아노를 위한 실제 음악 작품입니다. 총 100 곡으로 구성된 이 피아노 연습집은 갈수록 난이도를 높여가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게끔 엮어졌기 때문에, 이 백 곡을 차근차근 연마하면 이론적으로는 피아노의 정상, 즉 빠르나쓰의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지요. 피아노를 배워 보신 분들은 아마 아농 (Charles-Louis Hanon) 이나 체르니 (Carl Czerny) 의 연습곡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 교본들이 바로 그라두쓰 아드 빠르나쑴의 일종입니다.

드뷔씨의 유명한 Doctor Gradus ad Parnassum 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들의 구석 (Children's Corner) 의 첫 곡인 이 작품은 피아노를 배우는 어린이들이 지겨워하는 연습곡을 의인화하여 박사라는 호칭을 붙였고, 그럼으로써 제목만 들어도 따분하고 현학적인 느낌을 줍니다. 곡 자체도 음계 연습을 연상시키지만, 물론 이 작품은 연습곡이 아니라 재미있는 풍자곡이지요.

아르뚜로 베네데띠 미껠란젤리가 연주하는 그라뒤쓰 아드 빠르나썸 박사

mardi 19 août 2008

빠르나쓰 (Parnasse)

빠리의 몽빠르나쓰가 1차대전 이후 세계적인 예술의 중심지가 되기 이전, 이미 프랑쓰 문화계에서는 빠르나쓰라는 명칭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빠르나쓰는 19세기 후반, 지나치게 감성적인 낭만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운동으로, 특히 시 분야에서 활발했습니다. Parnasse 라는 이름은 물론 Montparnasse 와 마찬가지 어원을 가지고 있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Le Parnasse contemporain (현대의 빠르나쓰) 이라는 시집의 제목에서 왔습니다. 약 십여년에 걸쳐 (1866-1876) 모두 세 권으로 나뉘어 발표된 이 시집은 거의 육백여편에 가까운 시를 수록하고 있으며, 빠르나쓰 운동의 선구자인 떼오필 고띠에 (Théophile Gautier) 부터 시작하여, 총 99명의 시인이 참여했습니다. 이 99명의 시인을 parnassiens 이라고 칭하는데, 그 대다수는 사실 오늘날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다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빠르나씨앙 중에는 르꽁뜨 들 릴 (Charles Leconte de Lisle), 프렁쓰 (Anatole France),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 베를렌 (Paul Verlaine), 말라르메 (Stéphane Mallarmé) 등 매우 유명한 시인들도 있었습니다.

사람 수가 99명이나 되느니 만큼, 게다가 방금 인용한 이름들처럼, 독자적인 명성을 떨칠 만큼 개성이 뚜렷한 시인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빠르나쓰 운동을 단 한 마디로 규정짓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빠르나씨앙들은 모두 지나친 낭만성을 배제하고 엄격한 형식미를 추구했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이들은 시의 내용이나 의미보다는 어려운 운율과 각운, 특이한 음절수를 가진 싯구와 희귀한 단어 등을 찾는 데에 몰두했으며, 고띠에가 주장한 « 예술을 위한 예술 » (l'art pour l'art) 을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빠르나씨앙들에 의하면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지 다른 무엇을 위해서 소용된다면 그것은 추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사회 문제에 작가가 참여하거나, 예술가가 정치적 의견을 표명하는 것 등에 반대했으며, 개인 감정을 드러내거나 도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도 피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작품은 상당히 비개성적이 되었으며, 현실을 외면하려 했기에, 자연스럽게 먼 시대, 먼 장소 (예를 들면 고대 에집트) 를 동경하거나, 아니면 때와 장소를 아예 알 수 없거나, 그런 것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는 주제 - 한마디로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내용을 다룹니다. 중요한 것은 시를 읽었을 때 소리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과 조화이지요. 형식미에 치중했다는 점에서 빠르나씨앙들의 시는 상당히 음악적인 데가 있으며, 실제로 이들은 음악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형태의 예술이라고 추앙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빠르나씨앙들의 시는 번역해서 읽으면 별로 흥미를 느낄 수 없습니다 (다른 시들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관심있는 분들은, 비록 르 빠르나쓰 꽁떵뽀랑에 발표된 작품은 아니지만, 그냥 맛보기로, 베를렌의 달빛의 한 구절을 감상해 보세요. 빠르나쓰 시와 비슷한 분위기를 대략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빠르나씨앙들과 모든 점에서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주장 중 마음에 드는 것 한가지는, 진짜 아름다운 예술 작품은 피나는 노력 끝에만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예술가가 자신의 즉각적인 감정을 절제하지 않고 그대로 표출하기만 하면 예술 작품이 된다거나,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영감을 받으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식의, 극도로 낭만적인 생각들이 퍼져 있었는데, 빠르나씨앙들은 이런 생각들에 반발했습니다. 그들은 예술도 다른 기술처럼 차근차근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 것이며, 많은 정성과 공을 들여, 갈고 닦고, 고치고 다듬어야만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답니다.

빠르나쓰 운동은 상징주의 (symbolisme) 를 낳는데 한몫 했습니다. 비록 상징주의는 빠르나쓰가 지나치게 형식미에만 집중한다고 비난하기는 했지만, 사실 빠르나쓰와 많은 특징들을 공유합니다. 베를렌, 보들레르, 말라르메 등이 빠르나쓰앙인 동시에 상징주의 시인인 것도 그런 까닭이지요. 그리고 또다른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인 랑보 (Arthur Rimbaud) 는 어린 시절 바로 르 빠르나쓰 꽁떵뽀랑을 읽고 시인이 되기를 결심했다고 합니다.

samedi 16 août 2008

몽빠르나쓰 (Montparnasse)

몽빠르나쓰는 빠리 중심에서 약간 남쪽, 대략 6구와 14구, 15구가 만나는 지점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네를 일컫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그리쓰의 유명한 빠르나쏘쓰 산에서부터 온 것인데, 이 산은 특히 아뽈롱과 뮈즈들의 거처, 즉 문화와 예술의 근원지로 간주되곤 하지요. 그런데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빠리의 몽빠르나쓰 일대에 산은 커녕 도무지 낮은 경사조차도 보이지 않습니다. 빠리 사람들이 몽마르트르 (Montmartre)몽 쌍뜨-쥰비에브 (Mont Sainte-Geneviève) 처럼, 산 같지도 않은 걸 산이라고 부르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말이지요. 왜 그럴까요 ?

사실은 18세기까지는 현재의 불바르 뒤 몽빠르나쓰 (bd. du Montparnasse) 와 불바르 라스빠이으 (bd. Raspail) 가 교차하는 지점 쯤에 작은 언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불바르 뒤 몽빠르나쓰를 뚫으면서 깎여 없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애초에도 이 언덕은 진짜 산은 아니었습니다. 1860년까지 몽빠르나쓰는 빠리의 외곽으로서, 그 지하는 수백년 동안 채석장으로 쓰였는데, 여기서 돌을 캐내고 난 후, 한 쪽 옆에다 필요 없는 흙과 자갈 등을 쌓아 놓기를 오랜 세월을 하다보니, 거의 작은 산을 이룰 정도가 된 것입니다. 이 인공 흙더미에 옛날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빠르나쓰 산 (Mont Parnasse) 이라는 시적인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옛날에 몽빠르나쓰가 있던 교차로
(멀리, 유명한 꺄페 라 로똥드가 보입니다)
그런데 이 비웃기 위해 붙인 이름이 20세기 들어서면서 제 값을 하게 되었습니다. 몽마르트르에서 살던 화가들과 시인들이 점차 빠리 시내와 보다 가까우면서 방값도 적당한 몽빠르나쓰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많은 외국인 망명객, 또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프랑쓰 사람들이 모여 들면서, 몽빠르나쓰는 매우 다양한 색깔을 지닌 활기찬 동네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다 유명한 꺄페, 뮤직홀, 극장 등이 밀집되면서 몽빠르나쓰는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을 유혹했습니다. 몽빠르나쓰에서 살았던 유명한 사람들 중 몇몇 : 모딜리아니, 위트리요, 쑤띤, 브락, 샤걀, 삐까쏘, 루오, 끌레, 레제, 마띠쓰, 그리쓰, 부르델, 쟈꼬메띠, 뒤셩, 쟈꼽, 아뽈리네르, 썽드라르,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밀러, 파운드, 레, 콜더, 죠이쓰, 레닌, 트로츠끼, 싸띠, 미요, 오네게르. 오릭, 뿔랑크, 아라공과 트리올레, 싸르트르와 보브와르, 드미와 바르다...

몽빠르나쓰를 찾은 사람들의 국적은 각양각색이었지만, 20년대에는 특히 금주법을 피해서 도망온 미국인들이 많았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작가, 예술가, 지식인들로서, 역시 몽빠르나쓰가 자유와 예술의 중심지가 되는 데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또 19세기 말에 프랑쓰 북서부를 연결하는 기차 노선이 생긴 이후로는 많은 브르따뉴 사람들이 몽빠르나쓰로 모여들었습니다. 몽빠르나쓰 역에 내린 이들은 멀리 가지 않고 이 주변에 정착한 것이지요. 브르따뉴 사람들은 프랑쓰 나머지와는 다르게 쎌트 문화권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역시 몽빠르나쓰가 색다른 분위기를 갖는데 한 몫 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시작된 재개발 계획 때문에 이런 전설적인 몽빠르나쓰의 자취는 많이 사라졌습니다. 옛 몽빠르나쓰 역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는 59층짜리 몽빠르나쓰 빌딩이 들어섰으며, 그 옆에 약간 자리를 옮겨 빠리에서 유일하게 현대식 외관을 갖춘 기차역이 새로 지어졌습니다. 현재는 역과 빌딩을 중심으로 백화점을 비롯한 여러 현대식 상업 시설과 사무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La tour Montparnasse et la gare Montparnasse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번화가에서부터 조금만 멀어지면 몽빠르나쓰는 상당히 쾌적한 분위기를 주는 동네입니다. 대단한 관광거리는 없지만, 죽죽 뻗은 대로에 가로수가 울창한 넓은 인도, 종종 눈에 띄는 아르 데꼬 건물들, 여전히 밀집되어 있는 크렙 식당들 (크렙은 브르따뉴의 전통 음식), 유서 깊은 꺄페들과 크고 작은 연극 무대들, 호젓한 몽빠르나쓰 묘지... 이 모든 것들이 몽빠르나쓰를 여전히 매력적인 장소로 유지해 주고 있습니다.

jeudi 7 août 2008

세탁선 (Bateau-Lavoir)

세탁선 (un bateau-lavoir) 이란, 이름 그대로 빨래를 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배를 말합니다. 세탁기는 커녕, 집에 수도 시설 조차 없던 때에 - 대략 20세기 초까지는 빨래를 하기 위해 일부러 빨래감을 가지고 빨래터 (lavoir) 까지 찾아다녀야 했는데, 세탁선이 바로 그런 빨래터의 일종이었던 것입니다. 빨래터는 어차피 물가에 만들어야 하기에, 아예 강에 둥실 떠 있는 빨래터를 만든 것이지요. 세탁선으로 사용된 배들은 비교적 큰 규모로서, 안을 개조하여, 물을 퍼 올리는 시설, 물을 끓이는 시설, 빨래 말리는 장소 등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간혹 강을 따라 운항을 하며 이곳 저곳 옮겨 다니는 세탁선도 있었지만, 대개 이런 배들은 운항을 하기에는 좀 낡은 배들을 개조한 것이라, 한 장소에 정착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가서 더 자세한 설명과 사진들을 보세요.)

그런데 몽마르트르 산등성이에도 유명한 세탁선이 하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배도 아니고, 빨래터도 아닙니다. 단지 이름만 그렇게 붙었을 따름이지요. 몽마르트르의 세탁선 또는 바또-라브와르 (le Bateau-Lavoir) 는 20세기 초반에 많은 화가들이 살았던 건물입니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훗날 유명인이 되었지요 : 반 동겐, 모딜리아니, 그리쓰, 삐까쏘, etc... 또 오랜 기간 상주하지는 않았더라도 로렁쌍, 블라망끄, 뒤피, 마띠쓰, 브락, 레제, 드랑, 위트리요, 브란꾸지, 루쏘 등이 이 곳을 거쳐갔습니다. 그리고 화가들 외에도 아뽈리네르, 쟈리, 꼭또, 라디게, 스타인 남매, 쌀몽, 쟈꼽 등의 작가들 역시 자주 이 곳에 모였다고 하지요. 바또-라브와르는 그래서 20세기 초반에 명실공히 현대 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무엇보다도 입체주의 또는 뀌비슴 (cubisme) 의 탄생지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서 1906년과 1907년에 걸쳐 삐까쏘가 아비뇽의 아가씨들 (Les Demoiselles d'Avignon) 을 그렸기 때문이지요.

애초에 피아노 공장이었던 이 건물은 1889년부터 화가들의 작업실로 변모되기 시작하였으며 1904년에 막쓰 쟈꼽이 바또-라브와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건물 모양이 세탁선들과 비슷하다하여). 지금은 아무리 상상력을 가지고 보아도 이 건물에서 전혀 배 모양이 연상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원래 건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무로 지어졌던 건물은 1970년 모두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그저 밋밋한 시멘트 벽만을 밖에서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이 건물은 지금도 여전히 화가들의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이미 1차대전무렵부터 예술의 중심지로서의 빛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몽마르트르에 살던 많은 화가들이 몽빠르나쓰로 이주하였기 때문이지요.

세탁선 (Bateau-Lavoir)

lundi 4 août 2008

걀렛 풍차방아 (Moulin de la Galette)

몽마르트르에서 떼르트르 광장보다 훨씬 더 색다른 볼거리는 걀렛 풍차입니다. 뤼 르삑 (rue Lepic) 과 뤼 지라르동 (rue Girardon) 이 만나는 모서리에 17세기부터 자리잡고 있는 이 풍차는 빠리에 남아있는 유일한 풍차이며, 지금도 여전히 작동이 가능한 상태라고 합니다 (물론 여러차례 보수, 복원 공사를 거쳤습니다). 유일하다고 했는데, 사실 알고보면 풍차가 두 개 있습니다. 길가에 있어서 사람들 눈에 쉽게 띄며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사진에 담아가는 풍차 (Radet) 말고도, 보다 안 쪽을 잘 들여다보면 풍차가 하나 더 (Blute-fin) 있습니다. 라데와 블륏-팡, 이 두 풍차를 합해서 걀렛 방앗간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길거리의 라데 풍차와 숨어 있는 블륏-팡 풍차


작동이 가능하다고는 해도 지금은 물론 이 풍차들을 사용하여 방아를 찧지는 않습니다. 그러기는 커녕, 방앗간은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음식점으로 영업을 바꿨습니다. 그런데 사실 완전히 식당이 되기 전에도 이 방앗간은 이미 어느 정도 간이 식당이었습니다. 풍차를 이용해서 빻은 곡식으로 얇은 빵, 즉 걀렛 (galette) 을 만들어 팔았던 것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바로 여기서 방앗간의 이름이 생겨났지요.

술집겸 식당이 되고 나서 이 방앗간은 많은 화가들의 단골집이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몽마르트르가 예술의 중심지였을 때 많은 화가들이 이 풍차의 외형이나 식당 안의 흥겨운 풍경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그 중 몇 점 :

벙 고그, 걀렛 풍차 (Van Gogh, Moulin de la Galette)
위트리요, 뤼 똘로제와 걀렛 풍차 (Utrillo, Rue Tholozé et Moulin de la Galette)
르느와르, 걀렛 풍차의 무도회
(Renoir, Le Bal du Moulin de la Galette)

르느와르의 윗그림을 재 작업한
뒤피의 걀렛 풍차 (Dufy, Moulin de la Galette)

뚤루즈-로트렉, 걀렛 풍차 (Toulouse-Lautrec, Moulin de la Galette)
삐꺄쏘, 걀렛 풍차 (Picasso, Moulin de la Galette)
반 동겐, 걀렛 풍차 (Van Dongen, Moulin de la Galette)

samedi 2 août 2008

떼르트르 광장 (Place du Tertre)

떼르트르 광장성심 성당 바로 뒤 쪽에 있으며, 성심 성당 다음으로 몽마르트르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모이는 장소인데, 도대체 그 이유를 짐작하기가 힘듭니다.

tertre 라는 말은 « 언덕, 작은 산 » 을 뜻하는 일반 명사로, Place du Tertre 는 말그대로 « 언덕 위의 광장 » 이라는 뜻이지요. 산꼭대기 위의 이 작은 광장에 옛부터 식당과 찻집 등이 들어섰고, 거기 오는 손님들에게 그림을 파는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지금도 역시 몽마르트르의 풍경이나 관광객들의 초상화를 그려 파는 무명의 화가들이 활동 중이나, 떼르트르 광장은 이제 도무지 발 디딜 틈이 없는 시장판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떤 사람들 말로는 떼르트르 광장에서 볼거리는 바로 관광객이라고 하더군요. 좋게 말하면, 활발하고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이지만, 아무튼 낭만적인 정취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떼르트르 광장의 한쪽 구석 (un coin de la place du Tertre)

vendredi 1 août 2008

퓌니뀔레르 (funiculaire)

몽마르트르에 오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손쉽고 빠른 방법은 퓌니뀔레르를 타는 것입니다. 퓌니뀔레르는 케이블 카의 일종인데,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케이블 카라고 부르는 것이 공중에 매달린 줄을 타고 다니는데 비해, 퓌니뀔레르는 바닥에 고정된 철도 위를 다니는 작은 기차입니다. 단 자체에 동력이나 운전대가 있는게 아니라, 줄을 당겼다 풀었다 함으로써 기차를 레일 위에서 이동시킵니다. 대부분 언덕, 산등성이 같은 비탈에 장착돼 있기 때문에, 줄을 감으면 퓌니뀔레르가 올라가고, 줄을 천천히 풀면 자체의 무게 때문에 아래로 내려가는 원리이지요. funiculaire 라는 이름도 라띠나어 funiculus, 즉 « 밧줄 » 에서 유래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밧줄보다는 철줄을 이용하지요.

퓌니뀔레르가 처음 태어난 곳은 바로 프랑쓰의 리용 (Lyon) 이었습니다 (1862년). 시내 한 복판에 산이 있는 리용은 한때 퓌니뀔레르 노선이 다섯개나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두 개만 활용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사라졌거나, 지하철로 변모되었습니다. 프랑쓰에는 리용, 빠리 뿐 아니라 여러 도시와 관광지에서 퓌니뀔레르를 이용하며, 프랑쓰 외에도 유럽의 도시들에는 퓌니뀔레르가 꽤 흔합니다.

이딸리아 꼬모의 퓌니뀔레르 (funiculaire de Côme, Italie)

사실 타도시들에 비해 빠리의 퓌니뀔레르는 장난감 수준이지요. 원래는 빠리의 퓌니뀔레르도 몽마르트르 아주 바닥부터 시작하여 꼭대기까지, 여러 정거장을 갖춘 긴 노선으로 만들 예정이었답니다. 또 1990년대에는 지하철 역과 곧장 이어지게 하려는 구상도 있었다고 하지요. 하지만 비용이나 기타 여러 다른 이유들 때문에 결국은 지금과 같은 짧은 길이로 남게 되었습니다 (승차시간 약 1분). 몽마르트르 주민들 중에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지만, 결국 이 퓌니뀔레르는 성심 성당을 찾는 관광객들이 재미로 타보는 놀이 기구인 셈입니다.

이 1분 정도를 타기 위하여 지하철이나 버쓰 표 한 장을 내야 합니다. 물론 정기권이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탈 수 있지요. 퓌니뀔레르는 빠리 교통 공사 (RATP) 에서 다루고 있고, 지하철 노선의 일부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지하철 노선도에도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빠리 지하철 노선도의 일부 (détail du plan de métro parisien)

퓌니뀔레르를 타기 싫은 사람들은 바로 옆의 층계로 걸어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모두 222개의 계단으로 구성된 이 층계는 빠리에서 가장 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빠리에서 가장 긴 계단과 그 오른편을 오르내리는 퓌니뀔레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