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udi 31 décembre 2009

augur 의 파생어들

불어 août 의 어원인 augustus 는 로마 제국의 첫 황제의 이름에서 유래했지만 이것은 고유명사는 아닙니다. 이 단어는 « 거룩한, 축성받은 » 이라는 뜻의 형용사인데, 가이우쓰 옥따위우쓰 뚜리누쓰 (Caius Octauius Thurinus) 가 황제가 되면서 별명으로 취했습니다. 이후 사실상 로마의 모든 황제들이 이 형용사를 자신의 이름 뒤에 붙이면서 augustus 는 결국 로마 황제들의 호칭 중 하나가 되버렸습니다. 물론 지금은 관습상 아우구스뚜쓰라고만 하면 로마의 첫 황제 가이우쓰 옥따위우쓰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가 8월에 죽었으므로, 그의 계승자가 선임자를 기념하기 위해 8월에 그의 이름을 준 것이 현재 août 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augustus 는 황제들의 호칭이 되기 이전에는 종교적인 단어였습니다. 이 말은 라띠나어 augur 로부터 왔는데, augur 란 « 미래를 점칠 줄 아는 사제 » 를 가리켰습니다. 이들은 특히 새들이 날아가는 방향이나 새들이 먹는 모이, 그리고 노래하는 소리 등을 듣고 좋은 일이 있을지 나쁜 일이 있을지를 판단했다고 하지요. augur 는 현대 불어로도 발전하여 augure 라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불어 augure 는 두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방금 말한 « 로마 시대의 사제 » 를 가리키고, 또 하나는 그 사제들이 하는 일, 즉 « 미래를 점치기 위해 주변을 관찰하는 일 » 또는 « 미래의 징조 » 입니다. 또한 augurer 라는 동사도 있는데, 이는 당연히 « 점치다, 예언하다, 예견하다 » 등의 뜻이지요. 그런가하면 자주 쓰이는 단어 inaugurer 역시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단어는 « 개막하다, 시작하다 » 등의 뜻인데, 이것은 애초에 새로운 성전이나 기념물 등을 지으면 아우구르들이 그 건물의 안전과 번성을 예언하며 축성하였기 때문입니다.

라띠나어 augur 는 불어에서 거의 모양에 변화가 없는 augure 뿐 아니라, 모양이 많이 달라진 heur 로도 발전하였습니다. heur 는 « 징조, 운, 행운 » 이라는 뜻이죠. 여기에 좋은 운이면 bon 을 붙이고, 나쁜 운이면 mal 을 붙여,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bonheur, malheur 라는 단어들이 태어났습니다.

다시 augustus 로 돌아와, 이 단어는 불어에서 auguste 로 발전하였습니다. 역시 프랑쓰에서도 로마에서처럼 왕들의 권위와 위엄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였던 단어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한 왕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 왕은 필립 2세 (Philippe II) 인데, 그는 44년간 재위하면서 프랑쓰 왕권을 강화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고, 왕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키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미 살아생전부터 auguste 라는 수식어가 이름 뒤에 따라다녔고, 지금도 필립 2세라기 보다는 필립 오귀스뜨 (Philippe Auguste) 라고 자주 불립니다. 더군다나 그는 8월에 태어났기 때문에 아주 적당한 별명이었던 것이지요.

Auguste 는 또한 남자 이름으로도 쓰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Augustin, Augustine 같은 애칭들이 나오기도 했구요. Augustin 을 더 줄이면 Tintin 이 됩니다. 물론 TintinAugustin 외에도 Martin 이라든지 Justin 이라든지, 다른 이름의 애칭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만화 주인공 땅땅의 진짜 이름이 오귀스땅일 수도 있다는 사실 ! 이렇게 불어에서는 한 음절을 반복하여 애칭을 만들 때가 많은데, 마찬가지로 Auguste 의 중간 음절을 반복하여 Gugusse 라는 애칭도 있습니다. gugusse 는 이제는 일반명사화 되어 « 써커쓰의 광대 » 를 뜻하기도 하고, 넓은 의미에서 그저 « 웃기는 사람 », 그리고 더 넓은 의미에서 그저 « 사람, 남자 » 의 뜻으로도 쓰입니다. 특히 이 단어는 군대에서 많이 쓰이면서 gus 로 다시 한 번 줄어, « 군인 », 그리고 뜻이 또 확장되어 « 녀석, 놈 » 등의 뜻이 되었습니다. 원래는 고귀하고 엄숙하고 종교적인 의미였던 augustus 가 참 많은 변화를 겪었지요 ?

mardi 22 décembre 2009

prononciation de « août » (août 의 발음)

불어로 된 달의 이름 중에서 8월을 칭하는 août 은 그 발음이 특이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와 관련된 재미있는 내용을 아래에 실었습니다.
Je recopie ci-dessous un article intéressant sur la prononciation du mot août. La source de l'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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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de publication sur le site : 31 juillet 2007
La Lettre du CSA n° 207 - Juillet 2007   

Bientôt le « joli août »...

Dans le cadre de la mission du Conseil consistant à veiller à la défense et à l'illustration de la langue française dans les médias audiovisuels, La Lettre du CSA du mois de juillet donne quelques précisions sur la pronociation du mot « août ». C'est cet article qui est reproduit ci-dessous.

Comme chaque année, le mois d'août suscite sur les antennes quatre prononciations différentes : [ou], [out], [a-ou] [a-out]. Pierre Fouché, dans le Traité de prononciation française (1969), recommande la prononciation [ou] et précise : « La prononciation [a-ou] est archaïque ou dialectale. Il en est de même de [out] et à plus forte raison de [a-out] ».

Le Petit Robert (2007) et le Petit Larousse illustré (2007) donnent [ou] et [out] alors que des éditions antérieures ne retenaient que le mois d'[ou].

Pour Joseph Hanse, dans le Nouveau Dictionnaire des difficultés du français moderne (1987), « Le mois d'août se dit [ou] mais beaucoup prononcent le t final. La prononciation [a-out] est fautive alors qu'elle est correcte dans les dérivés aoûtat, aoûté et aoûtien [aoussien] ».

Dans le Dictionnaire des difficultés du français (1993), Jean-Paul Colin recommande « la seule prononciation correcte [ou], le t devant rester muet, bien que l'usage se répande, notamment dans les médias de prononcer [a-ou] ».

Maurice Grevisse, dans Le Bon Usage (1986), donne la prononciation habituelle [ou] mais trouve excessif de condamner [out].

Moins sévères sont les recommandations données par le Dictionnaire de l'Académie française qui, dans sa neuvième édition, note : « Août se prononce [ou] plutôt que [a-ou], le t se fait parfois entendre ». La septième édition (1878) préconisait [ou] mais signalait cependant « on prononce souvent [out] ».

Quelques années auparavant, Émile Littré, dans le Dictionnaire de la langue française (1863-1873), indiquait : « Août se prononce [ou], l'a ne se prononce pas. Pourtant quelques personnes prononcent [a-ou] ».

Venant du latin Augustus (mensis), substitué en l'honneur de l'empereur Auguste à Sextilis mensis (sixième mois devenu huitième mois lors de l'instauration du calendrier grégorien), ce mot de quatre lettres n'a cessé de provoquer de vives querelles à cause tant de sa prononciation que de sa graphie.

Dans son traité complet de prononciation, Comment on prononce le français (1917), Philippe Martinon écrit au sujet de l'histoire du mot : « Dans « août », l'a a cessé de se prononcer depuis le XVIe siècle [...] ; on a malheureusement continué d'écrire « août » avec un a [mais] la prononciation [a-ou] est surannée ». Il signale que la prononciation [a-ou] réapparaît à partir du XIXe siècle chez les orateurs et chez les poètes comme Victor Hugo, Sainte-Beuve et Henri de Régnier mais, pour lui, « on serait dans la tradition française en prononçant toujours et uniquement [ou] ».

En 1930, Léon Clédat raconte que Voltaire qui, dans l'avertissement de Zaïre affirme que le mois d'août se prononce [out], commençait ainsi une lettre à la marquise du Deffand « À Ferney le 19 Auguste », car il trouvait trop barbare d'écrire août et de prononcer [ou].

Si le « joli août » n'a pas de barque sur le Rhin, des poètes l'ont fêté comme mois de la moisson, avec une rime en [ou] :

« Dites ! L'ancien labeur pacifique, dans l'août
Des seigles murs et des avoines rousses,
Avec les bras au clair, le front debout
Dans l'or des blés qui se retrousse
Vers l'horizon torride où le silence bout ». (1)

Au sens figuré, le mot a désigné l'âge de la maturité par comparaison des périodes de la vie avec les mois des travaux agricoles : « D'ailleurs, elle touchait au mois d'août des femmes, époque tout à la fois de réflexion et de tendresse ». (2)

Enfin, il fut aussi employé dans la locution « faire l'août », c'est-à-dire faire la moisson, et dans l'expression aujourd'hui disparue « faire son août dans une affaire », au sens d'y gagner beaucoup, d'en tirer énormément de prof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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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Émile Verhaeren, « La plaine », Les Villes tentaculaires, 1895.
(2) Gustave Flaubert, L'Éducation sentimentale, 1869.

dimanche 20 décembre 2009

달 이름의 유래 (nom des mois)

불어에서 매달매달의 이름은 모두 라띠나어에서 유래하였는데,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점은 로마 시대에는 새해가 3월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학년제와 비슷하다 할 수 있겠지요. 3월부터 시작하여 그 어원을 찾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mars : 3월은 라띠나어로 martius 라 했고, 로마 신화 속의 군신 마르쓰 (Mars) 를 기념하는 달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되었습니다.

avril : 4월은 라띠나어 aprilis 로부터 유래했는데, 이 라띠나어의 뜻은 모호합니다. 이미 로마시대부터 어떤 사람들은 이 단어가 그리쓰의 여신 아프로딧 (Aphrodite) 을 기념하는 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고, 또다른 사람들은 라띠나어 동사 aperire, 즉 « 열다 » 에서 기원했다고 보았습니다. 4월은 사실상 봄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꽃들이 만개하고 모든 생명이 새로 솟는 만큼 열리다 라는 동사에서 그 어원을 찾은 것도 이해는 갑니다. 또다른 주장은 라띠나어 형용사 apricus 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이 형용사는 « 양지바른, 해가 잘 드는, 햇빛을 좋아하는 » 이라는 뜻인데, 역시 봄의 시작과 관계가 있는 해석입니다.

mai : 5월을 가리키는 말은 라띠나어 maius 에서 왔으며, 이 말은 그리쓰와 로마 신화 속의 여신 마이아 (Maia) 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juin : 6월은 라띠나어 iunius 에서 비롯되었고, 이 단어는 로마의 여신 유노 (Juno) 를 기념하는 달입니다.

juillet : 7월을 칭하는 이름은 라띠나어 iulius 가 변해서 된 말인데, 이것은 율리우쓰 까에싸르 (Julius Caesar) 의 이름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원래 애초에는 이 달의 이름은 quintilis 였으며, 그저 « 다섯번째 달 » 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새해가 3월부터 시작하므로 7월은 다섯번째 달이 맞지요. 그러던 것을 아우구스뚜쓰 (Augustus) 황제가 까에싸르를 기념한다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바꾼 것입니다.

août : 8월도 7월과 비슷한 현상을 겪었습니다. 원래 8월의 이름은 sextilis, 즉 여섯번째 달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우구스뚜쓰의 후계자였던 띠베리우쓰 (Tiberius) 가 양아버지이자 선임 황제였던 아우구스뚜쓰를 기념한다하여 augustus 라고 달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단어가 차차 변하고 줄어, 불어에서는 août 이 되었습니다. août 은 발음이 조금 문제가 되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셔요.

septembre : 9월의 이름은 라띠나어 september 에서 왔으며, 이 단어는 그저 일곱번째 달이라는 뜻입니다. 역시 3월을 시작으로 보았을 때 이야기이지요. 불어 숫자 sept (7) 을 생각해 보면, 같은 어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octobre : 10월도 9월과 마찬가지 원칙입니다. 라띠나어 october 는 여덟번째 달이라는 뜻이며, 불어 huit (8) 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novembre : 11월 역시 아홉번째 달이라는 뜻의 라띠나어 nouember 에서 왔습니다. 불어 neuf (9) 도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décembre : 12월을 칭하던 라띠나어 december 는 열번째 달이라는 뜻이며, 현대 불어 dix (10) 도 같은 어원입니다.

janvier : 1월은 조금 더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초창기의 로마력은 데껨베르로서 한 해가 끝났으며, 나머지 육십여일은 날짜를 세지 않았다고 합니다. 농경 시대에는 겨울 동안 활동을 하지 않았고, 그저 3월의 꺌렁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지요. 하지만 누마 뽐삘리우쓰 (Numa Pompilius) 라는 왕 (기원전 8-7세기) 이 달력을 개편하면서 1월과 2월을 연말에 추가했습니다. 어쨌거나 1월의 이름은 라띠나어 januarius 에서 왔으며, 이 달은 로마의 신 야누쓰 (Janus) 를 기념합니다.

février : 2월은 라띠나어 februarius 에서 온 이름인데, 이 단어는 동사 februare, 즉 « 정화하다, 순화하다 » 라는 뜻입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은 애초에는 야누아리우쓰와 페브루아리우쓰의 순서가 서로 뒤바뀌어 있었습니다. 즉 누마 뽐삘리우쓰가 달력을 개편했을 때는 데껨베르에 이어지는 달 이름을 페브루아리우쓰라 불렀고, 그 뒤에 오는 달을 야누아리우쓰라 불렀으며, 이러한 관습이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450년 경, 두 달의 이름을 뒤집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153년부터 1월 1일을 새해의 시작으로 보게 되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랍니다.

dimanche 13 décembre 2009

꺌렁드 (calendes)

라임바웃 데 바께이라쓰 (Raimbaut de Vaqueiras) 의 에스떵삐 Calenda maia 는 « 오월의 첫 날 » 이라는 뜻입니다. 옥어 calenda, 불어 calendes 는 라띠나어 calendae 로부터 온 단어이며, 이것은 고대 로마 시대에 매 달의 첫 날을 지칭하던 용어였습니다. 로마력에서는 매일매일을 숫자로 세지 않고, 몇몇 특정한 날들, 즉 꺌렁드 (매 달 첫 날), 이드 (ides, 매달 보름) 등과 같은 날을 기준으로 하여 날짜를 세었습니다. 즉 꺌렁드로부터 며칠 전 날, 이드로부터 며칠 전 날 식으로 불렀던 것이지요. 따라서 이 꺌렁드라는 개념은 로마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날짜였으며, 새로운 꺌렁드가 시작하기 전 채무 관계를 모두 정리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꺌렁드에 맞추어 돈 갚고 받을 날짜를 적어 둔 책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달력 (calendrier) 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또한 불어 속담 중 renvoyer aux calendes grecques « 그리쓰 꺌렁드로 미루다 » 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말은 존재하지 않는 날짜를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꺌렁드라는 이름은 로마 시대에 와서야 생겨난 것으로, 그리쓰 시대에는 첫 날을 꺌렁드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 성 글랑글랑의 날에 » 와 같은 뜻입니다.

dimanche 6 décembre 2009

에스떵삐 (estampie)

에스떵삐는 13세기와 14세기에 유행했던 기악 음악의 한 졍르로, 애초에는 춤곡이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형식의 특징은 같은 악절이 두번씩 반복되면서, 다만 마지막 부분만 살짝 다르다는 것입니다. 두번씩 반복될 때, 첫번째는 열린 형식 (ouvert) 으로, 두번째는 닫힌 형식 (clos) 으로 끝납니다. 따라서 형식을 요약하면 AA' BB' CC'... 와 같습니다. 즉 부속가와 매우 비슷한 것이지요. 에스떵삐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부속가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에스떵삐들은 모두 순수한 기악곡인데, 오로지 단 한 곡, 그리고 가장 오래된 에스떵삐이며 가장 유명하기도 한 깔렌다 마야 (Calenda maia 또는 Kalenda maya) 는 가사를 가지고 있는 성악곡입니다. 이 노래는 라임바웃 데 바께이라쓰 (Raimbaut de Vaqueiras) 라는 트루바두르가 이딸리아에 머물던 중 프랑쓰로부터 온 두 명의 죵글뢰르 (jongleur) 가 연주하는 기악곡을 듣고 여기에 시를 붙인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음악을 라임바웃이 작곡했다고 볼 수 있는지 의심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에스떵삐도 애초에는 순수 기악 춤곡이었을 확률이 많다는 이야기지요. 또는 이 이야기는 그저 전설처럼 전해지는 일화로 보고, 실제로 이 노래의 시와 음악을 모두 지은 사람이 라임바웃이 맞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최초의, 또는 가장 오래된 에스떵삐는 옥씨따니 (Occitanie) 에서 유래했다고 보아야 할 듯 싶습니다. 비록 이딸리아에서 작곡되기는 했어도, 라임바웃은 옥씨따니 사람이니까요. 실제로 불어 estampie 라는 단어는 옥어 estampida 에서부터 전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14세기에는 istanpita 라고 이딸리아어화된 이름으로 불리는 에스떵삐들이 여러 곡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부제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 중 하나는 saltarello 라는 부제가 실려 있습니다.

라임바웃 데 바께이라쓰의 깔렌다 마야 의 기악 연주

samedi 5 décembre 2009

쌀따렐 (saltarelle)

16세기에 유행했던 춤 중에 갸이야르드와 비슷한 것으로 쌀따렐이라는 춤이 있습니다. 이딸리아어로는 saltarello 라고 하는데, 이딸리아어 동사 saltare (= sauter = 뛰다, 도약하다) 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16세기의 쌀따렐과 갸이야르드는 사실상 큰 차이가 없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쌀따렐이 보다 작은 도약을 하는 춤이고, 갸이야르드는 더 « 힘있는 » (= gaillard) 도약을 하는 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음악적으로는 제목을 어떻게 붙였느냐의 문제이지 실질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갸이야르드처럼 쌀따렐 역시 빠반 같은 악곡과 짝을 이루는 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쌀따렐은 갸이야르드보다 역사가 더 깊은데, 이미 14세기부터 쌀따렐이라는 춤곡이 등장했었으며, 이 때의 쌀따렐은 갸이야르드와는 다릅니다. 14세기의 쌀따렐은 모두 단선율 기악곡이며, 오히려 에스떵삐 (estampie) 와 흡사한 유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세 쌀따렐 한 곡

jeudi 3 décembre 2009

갸이야르드 (gaillarde)

갸이야르드는 흔히 빠반과 결합하여 추어졌던 16-17세기의 춤으로, 빠반이 느리고 장중한 반면, 갸이야르드는 보다 밝고 빠릅니다. 사실 gaillard 라는 단어 자체가 « 활발한, 힘있는, 즐거운 »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빠반이 2박자 또는 4박자 계열인데 반해, 갸이야르드는 3박자 계열, 즉 3/2, 3/4, 6/8 박자 등으로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갸이야르드도 빠반과 마찬가지로 이딸리아에서 유래한 춤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딸리아말로는 gagliarda.

갸이야르드는 이름대로 발을 « 힘차게 » 차 올리면서 추던 춤이었는데, 그런 점에서 쌀따렐 (saltarelle) 과 매우 흡사합니다. 사실상 쌀따렐과 갸이야르드는 이름 말고는 차이가 그다지 없으며, 음악적으로는 특히나 구별이 불가능합니다. 갸이야르드는 빠반과 마찬가지로 프랑쓰와 이딸리아에서 크게 유행했으며, 영국에서 버드, 다울랜드 등의 작곡가들에 의해서 기악곡으로 확립되었습니다.

을 위한 갸이야르드 한 곡

mercredi 2 décembre 2009

빠반 (pavane)

빠반이라는 춤은 se pavaner 라는 동사를 낳기는 했지만, 공작새 (paon) 와는 사실상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비록 빠반이라는 춤이 마치 공작새가 거닐듯, 여유롭고 느긋하며 거만스러운 데가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사실 엄격히 말하면 실제로 이 빠반이라는 춤이 어떤 춤이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6세기 유럽 궁정에서 추워진 것은 확실한데, 실제로 안무에 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춤을 반주하던 음악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 음악들의 성격이 모두 느리고, 엄숙하며, 장중한 분위기라는 점에서, 춤도 비슷한 성격을 가졌으리라 짐작해 보는 것입니다.

pavane 이라는 이름은 이딸리아어 padovana 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이 춤이 이딸리아의 도시 빠도바 (Padova) 에서 유래한 듯 싶습니다. 또는 에스빠냐가 근원지라는 설도 있는데, 그래도 이딸리아의 빠도바를 거친 다음에야 다른 곳에도 전파된 듯 보입니다. 아무튼 이딸리아, 프랑쓰, 에스빠냐, 그리고 심지어 독일의 궁정들에서 16세기 내내 유행하였는데, 특히 영국에서는 기악 음악의 한 형식으로 자리잡으면서 그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버드 (Byrd), 기본쓰 (Gibbons), 다울랜드 (Dowland), 등등이 빠반이라는 건반악기 작품을 정말 많이 남겼지요. 이런 사람들의 작품에서 느리고 4박자 또는 2박자 계열의 빠반은 대개 더 빠르고 즐거운 3박자 계열의 다른 춤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특히 갸이야르드 또는 쌀따렐). 영국 작곡가들의 작품에서 빠반은 흔히 pavan, paven, pavin 이라고 표기되기도 합니다.

보다 현대로 가까이 와서도 몇몇 작곡가들이 빠반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쌍썽쓰 (Camille Saine-Saëns) 의 빠반이 있고, 또 포레 (Gabriel Fauré) 의 빠반도 매우 유명하지요. 하지만 아마도 가장 유명한 빠반은 라벨 (Maurice Ravel) 이 작곡한 죽은 인판따를 위한 빠반 (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 일 것입니다. 이러한 빠반들은 물론 르네썽쓰 시대의 양식과는 매우 다르지만 그래도 역시 빠반의 특성을 잘 살려서, 느리고 무거우며 엄숙하면서도, 상당히 너울너울 춤 분위기가 나는 걸작들입니다.

포레의 빠반, op. 50

dimanche 29 novembre 2009

paon « 공작새 »

faisan 과 같은 동물을 phasianidés « 꿩과 » 라고 하는데, 이 과에 속하는 동물 중 발음에 문제를 일으키는 동물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paon ! « 공작새 » 를 뜻하는 이 단어는 o 가 묵음이 되어 pan 처럼 발음됩니다. 그 여성형 paonne 역시 [빤] 으로 발음되며, « 어린 공작 » 을 가리키는 paonneau 는 [빠노] 로 발음됩니다.

공작새가 꼬리를 자랑하며 걷는 모양을 본 따 불어에는 se pavaner 라는 동사가 있습니다. 즉 « 거들먹 거리며 걷는다 » 는 뜻이지요. 이러한 단어가 나온 것은 paon 의 어원이 라띠나어 pavo 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는 독립적으로 pavane 이라는 춤이 있는데, 역시 느리고 장중한 춤입니다. pavopavane 이 만나서 « 공작새처럼 잘난척 한다 » 는 뜻의 se pavaner 동사가 태어났습니다.

samedi 28 novembre 2009

fai 발음의 약화

monsieur 와 비슷한 발음 현상, 즉 특별히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강모음이 약화되는 현상이 일어난 또다른 단어로 faire 동사의 여러 변화형이 떠오릅니다. 불어를 공부한 사람들은 당연히 알아야 하는 거지만, faire 의 1인칭 복수 변화형 faisons 은 특이하게도 [프종] 으로 발음됩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다른 변화형들에도 영향이 미친 것 같습니다. 반과거형은 모든 인칭이 다 [프]로 발음되지요 : faisais, faisais, faisait, faisions, faisiez, faisaient. 또 미래형은 아예 글자 형태 자체가 발음에 맞게 변화되어 있습니다 : ferai, feras, fera, ferons, ferez, feront. 미래형이 이렇다 보니 조건법 형태 역시 당연히 영향을 받구요 : ferais, ferais, ferait, ferions, feriez, feraient. 또한 현재 분사 faisant 역시 [프정] 으로 발음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어원적으로 faire 와 전혀 무관한 faisan 이라는 명사 역시 이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faisan 은 « 꿩 » 을 가리키는 말로, 라띠나어 phasianus 로부터 유래했으며, 이 말의 원 뜻은 « 파씨쓰 강 주변에서 사는 새 » 입니다. 파씨쓰는 현재는 제오르지 (Géorgie) 를 흐르는 리오니 (Rioni) 강을 가리키던 고대 그리쓰어 이름인데, 실제로 꿩 중에서도 꼴쉬드 꿩 (faisan de Colchide) 이라 불리는 종은 이 강 근처에서 유래한 종이 맞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아무 관계가 없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faisan 을 비롯하여 그 파생어들은 모두 첫음절이 약화되는 현상을 겪었습니다 : faisane [프잔] « 암꿩 », faisandeau [프정도] 또는 faisanneau [프자노] « 어린 꿩 », faisanderie [프정드리] « 꿩양육 », faisandier [프정디에] « 꿩 키우는 사람 »... 마지막으로, faisander [프정데] 라는 동사가 있는데, 이것은 꿩을 비롯하여 사냥에서 잡은 동물의 고기로부터 즙을 얻어 내기 위하여 부패시키며 재워두는 행위를 말합니다.

vendredi 27 novembre 2009

monsieur

dame, damoiseau, demoiselle 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가진데 반해, monsieur 는 유일하게 독립된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물론 monsieur 의 결합인데, 이 sieur 는 라띠나어의 senior 로부터 왔으며, 이 말은 senex « 나이든 » 의 우등비교급입니다. 즉 « 더 나이든 » 이란 뜻이죠. 애초에는 나이든 사람을 우대하여 부르던 호칭이 남자에 대한 경칭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sieur 외에도 sire, seigneur 등 비슷한 호칭들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sénateur « 상원의원 » 도 마찬가지입니다. sénateur 들은 애초에 고대 로마의 정치인들로, 나이 지긋한 원로들이었습니다.

영어의 sir 도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불어 sire 로부터 건너 간 말이므로 당연하다 하겠지요. 한편 불어 monsieur 의 발음이 어찌하여 오늘날 [므씨으] 로 굳어졌는지는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lundi 23 novembre 2009

dame « 부인 »

불어 dame 은 라띠나어 domina 로부터 왔으며, 이 말은 dominus 의 여성형입니다. dominusdominadomus « 집 » 로부터 온 말로, 각각 « 남녀 집주인 » 을 뜻합니다. 로마 시대에는 자유인들만 집을 소유할 수 있었으며, 사실 집주인이라고 하면, 집 건물 뿐 아니라 집안의 다른 모든 물건,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 (특히 노예) 까지도 소유했으므로, domusdomina 는 « 주인 나리, 주인 마님 » 이란 뜻으로 쓰였습니다.

여기서 유래한 불어 dame 도 따라서 « 신분이 높은 귀부인 » 을 뜻했습니다. 이 때 나이나 결혼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죠. 예를 들어 프랑쓰의 공주들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dame 이라 불렸지, 결코 demoiselle 이라 불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demoiselledemoiselle 대로,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 소귀족 부인 » 을 뜻했던 말입니다. 즉, 아무리 결혼을 했고 나이가 많더라도, 신분이 높은 귀족의 부인이나 딸이 아니면 demoiselle 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현대로 오면서 dame 은 « 기혼 여성 », demoiselle 은 « 미혼 여성 » 을 일컫게 되었습니다.

demoiselle 이라는 말도 사실은 dame 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원래 단어는 damoiselle 이었으며, 또한 남성형 damoiseau « 도련님 » 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damoiseau 는 사실상 쓰이지 않으며, demoiselle 도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는 편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과는 다르게 프랑쓰의 이삼십대 여자들은 mademoiselle 이라고 불리는 것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어리게 본다고 기분 나빠하거나, 남자들이 딴 생각을 품고 하는 얘기 아닌가 경계심을 갖지요. 프랑쓰에서 특별히 어린 여자애들이 아니라면 mademoiselle 보다 차라리 madame 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난합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madame, mademoisellema 는 소유격 « 나의 » 입니다. 따라서 필요한 경우에는 이 부분을 바꿔주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모든 변화형이 가능하지만 특히 « 우리들의 부인 » 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notre dame 이라고 해야하겠지요. notre dame 이란 다름아닌 « 성모 마리아 » 를 칭합니다. 이 칭호는 기도 등에서 자주 쓰이고, 또 성모에게 바쳐진 교회의 이름으로도 자주 쓰입니다. 빠리의 주교좌 교회가 바로 Notre Dame 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 외에도 사실 Notre Dame 이라는 이름의 성당은 크고 작은 것이 도처에 있습니다. 따라서 빠리의 주교좌 성당을 가리킬 때는 항상 Notre Dame de Paris 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노트르 담 드 빠리의 남쪽면


반면, 이딸리아어에서는 « 성모 » 를 가리킬 때 우리의 부인이라 하지 않고, 나의 부인이라 합니다. 그래서 madonna 라는 말을 쓰지요. 이 때 donna 역시 domina 가 변천하여 생긴 말로 madonnamadame 은 결국 같은 구조와 어원을 가지며, 뜻도 비슷합니다. madonna 도 역시 옛날에 귀족 부인에 대한 경칭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madonna Lisa). 여기에 « 성모 » 라는 뜻이 하나 더 추가되어 있는 점이 불어와 다를 뿐이지요. 이 madonna 라는 이딸리아어를 그대로 불어에 수입하여 madone 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딸리아어에서 madonna 는 « 성모 » 를 가리키는데 비하여, 불어의 madone 은 « 성모상, 성모를 나타내고 있는 그림 » 을 말합니다.

Madone

samedi 7 novembre 2009

담놀이 (Jeu de dames)

장기와 비슷한 놀이로 프랑쓰에서 즐기는 담 (dames) 이라는 놀이가 있습니다. 담놀이판은 장기판과 매우 흡사하게 생겼는데, 64 꽁빠르띠멍 대신 정확하게 100 개의 꽁빠르띠멍으로 나뉘어진 점 만이 다릅니다. 담은 장기와 비슷한 듯 하지만 동시에 매우 다릅니다. 말이 움직이는 규칙은 일단 장기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여기서는 장기처럼 말마다 이름과 성격, 움직이는 노선이 정해져있지 않고, 스무 개의 말들이 모두 같은 모양으로 생겼으며, 같은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하지만 장기보다 훨씬 단순해 보이는 이 놀이도 막상 시작해 보면 상당히 복잡하고 다양한 상황을 헤쳐 나와야 합니다.

담놀이에 사용되는 말들은 동전처럼 생긴 동글납작한 원형으로써, 이 말들이 상대방 진영의 끝 줄까지 건너가서 닿으면 한낱 말 (pion) 에서 담 (dame = 왕비, 여왕, 부인) 으로 승격을 합니다. 담이 되면 다른 말과 구별하기 위해서 말을 하나 포개어 얹습니다. 그리고 사방팔방 마음껏 뛰어 다닐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지요. 그 때문에 바로 담이라는 이름을 주게 된 것 같습니다. 장기에서도 왕비는 매우 자유롭게 움직이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장기에서도 왕비를 잃는 것은 왕에게 치명적인데, 담놀이에서도 적에게 담을 하나 허락하고 나면, 사실 이기기가 매우 힘들어집니다.

담놀이에 사용되는 판은 damier 라고 합니다. 그런데 뜻이 발전하여 오늘날 damier 라고 하면 두가지 색의 네모가 교대되는 무늬를 칭합니다. 사실 장기판도 마찬가지 무늬이기 때문에 에쉬끼에 무늬라고 해도 될텐데, 이렇게 말하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다미에 무늬로 유명한 루이 뷔똥의 가방

mardi 3 novembre 2009

échec « 장기 » 또는 « 실패 »

« 장기 놀이 » 를 불어로 échecs (échec 의 복수) 이라 합니다. 이 단어는 뻬르쓰어 shah 가 변하여 된 것인데, « 왕 » 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매우 오래된 놀이인 장기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인도나 중국 쪽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하는데, 600년 경에는 뻬르쓰 (Perse) 에 이 놀이가 널리 퍼져있었답니다. 그리고 아랍 문화권과 에스빠냐를 거쳐 1000년 경에 유럽에 도입되었습니다. 뻬르쓰에서는 이 놀이의 가장 마지막에 더이상 왕이 꼼짝 못하게 되면, Shah mat 이라고 외쳤는데, 이것은 « 왕이 죽었다 » 는 뜻입니다. 현대 불어에서도 가장 마지막에 왕을 꼼짝 못하게 하는 수를 두면서 Échec et mat 이라고 외칩니다.

여기서부터 « 실패 » 라는 뜻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다양한 상황에서 자주 사용되는 échec 이라는 단어가 사실은 놀이에서 비롯되었으며, 애초에는 왕이라는 뜻이었다니, 정말 재미있지요 ?

한편 « 실패하다 » 라는 동사는 échouer 라고 하는데, échec 과 당연히 관계가 있어 보이지만, 의외로 이건 또 그렇지 않습니다. échouer 의 원래 의미는 « (배가) 좌초하다, (배 밑이) 땅에 닿다 » 라는 의미로서, 아마도 échoir « 떨어지다 » 와 상관있어 보입니다. 배가 물 위로 갈 길을 가지 못하고 땅에 닿아있으니, 여기서 실패하다라는 의미가 생겨난 것입니다.

요약하면 échec 이라고 단수로 쓰면 실패라는 뜻이거나 아니면 장기에서 왕을 지게 하는 결정적인 수를 가리킵니다. 반면 놀이 자체를 뜻하기 위해서는 échecs 이라고 복수를 사용합니다. 이 복수 형태가 영국으로 건너가서 chess 라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참고로 « 장기판 » 은 불어로 échiquier 라 합니다. 장기판은 담놀이판 (damier) 과는 다르게 64개의 꽁빠르띠멍으로 나뉘어져 있지요.

장기판이 새겨진 놀이용 탁자
졍-엉리 리즈네르 (Jean-Henri Riesener) 가 만든 것으로 추정됨 (1785)
빠리, 꺄르나발레 박물관
루이 16세기 떵쁠에 갇혀있는 동안 사용했던 장기말들
빠리, 꺄르나발레 박물관
옛날에 장기를 두던 모습
하이델베르크 대학, 마네쓰 필사본 (Codex Manesse, 14세기)

samedi 31 octobre 2009

compartiment « 칸 »

appartement, département 과 비슷한 단어로 compartiment 이 있습니다. 역시 여러 part « 몫 » 로 나누었다는 뜻인데, « 칸, 구획 »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가구 등의 내부를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끔 구분지워 놓은 것을 말합니다. 냉장고 안에도 여러 꽁빠르띠멍이 있어서 야채를 넣는 칸, 음료수를 넣는 칸, 얼음을 넣는 칸 등이 나눠져 있지요. 아니면 여행용 가방 안에도 여러 물건을 정리할 수 있게끔 꽁빠르띠멍들이 있습니다.

또한 꽁빠르띠멍은 기차에서 대여섯명씩 들어가서 앉아 있을 수 있게 만든 객실을 말하기도 합니다. 현재 프랑쓰의 떼제베들은 모두 기차 한 량이 뻥 뚫려서, 그 안에 좌석들이 죽 배열되어 있는 형태로 되어 있지만, 떼제베 이외의 기차들, 아직 옛날식으로 운영되는 기차들 중에는 꽁빠르띠멍으로 구분되어 있는 기차들도 간혹 있습니다. 그리고 꼭 객실이 아니더라도, 짐을 두는 곳 (compartiment bagages), 흡연실 (compartiment fumeur) 등에 꽁빠르띠멍이라는 이름을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정한 면적을 규칙적 크기로 나누어 놓은 각각도 꽁빠르띠멍이라 합니다. 예를 들면 장기판 (échiquier)담놀이판 (damier) 의 네모난 칸 하나하나가 꽁빠르띠멍이지요.

64개의 꽁빠르띠멍으로 나누어 놓은 장기판 (16세기)
빠리, 루브르

compartiment 은 이딸리아어 compartimento 에서 왔는데, 이 단어는 compartire 즉 « 나누다 » 의 명사형입니다. 결국 위에서 얘기한대로, appartement, département 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는 셈이지요.

jeudi 29 octobre 2009

appartement « 아파트 »

département 과 비슷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정확히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로 appartement 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département 과 비슷하게, 역시 하나의 커다란 전체를 여러 part « 몫, 부분 » 로 나누었다는 뜻이지요. 특히 하나의 건물을 여러 몫으로 나누어 여러 가구가 살 수 있게 해 놓은 주거 환경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아파트들은 모두 네모 반듯반듯하고, 모두 일정한 넓이와 획일적인 구조를 가지지만, 프랑쓰의 아파트들은 매우 다양한 모습을 지닙니다. 옛날부터 있던 건물들, 귀족이나 부유한 사람들이 살던 큰 건물을 그때그때마다 필요에 따라 나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한 층에도 여러 면적을 지닌 아파트들이 있고, 네모난 대신 비뚤비뚤한 모양이 생기기도 하며, 아래층과 윗층의 구조가 전혀 다른 일도 많고, 또 윗층과 아래층을 터서 이층 (duplex), 때로는 삼층 (triplex) 짜리 아파트들도 있습니다.

appartement 이라는 단어가 이미 1559년부터 불어에서 쓰인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지만, 이러한 주거 환경은 우리나라에서와는 달리 프랑쓰에서는 현대식 개념이 아닙니다. 이미 수백년전부터 프랑쓰의 도시들, 특히 빠리에는 여러 층으로 된 건물들이 있었고, 그 안을 잘게 쪼개서 사용했었지요. 또한 고층건물이 아니더라도, 작은 개인 집 안에서도 주거가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으면, 역시 그 각각을 아빠르뜨멍이라 부릅니다. 따라서 베르싸이으나 루브르 같은 옛 왕궁에서도 각각의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공간을 아빠르뜨멍이라 불렀습니다. 예를 들어 왕의 아빠르뜨멍이라고 하면, 궁 안에서 왕의 침실을 비롯하여, 접견실, 사무실, 비서실 등등으로 이루어진, 왕이 사용할 수 있도록 분리시켜 놓은 공간을 말했습니다.

호화로운 왕의 아빠르뜨멍과는 정반대로, 아파트들 중에 달랑 방 하나로만 구성된 아파트, 즉 침실과 거실의 구분 조차 없는 아파트를 불어로는 studio 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라띠나어 studium [스뚜디움] 에서 왔는데, 바로 « 공부 » 라는 뜻입니다. 영어의 study, 불어의 étude 등이 모두 이 단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즉 스뛰디오는 « 학생의 공부방 », 또는 « 예술가의 작업실 » 등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지요. 그 때문에, 부엌이나 화장실, 욕실 등이 아예 없거나, 매우 작거나, 복도나 지하에 있어서 공동으로 사용해야 하는 경우도 프랑쓰에는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아파트 라는 말은 영어 apartment 에서 왔겠지만, 영어 apartment 는 불어 appartement 이 건너가서 생긴 말입니다. 반면 불어 appartement 은 이딸리아어 appartamento 를 채택한 것이며, appartamento 는 또다시, 에스빠냐어 apartamiento 를 이딸리아어화 한 것입니다. 에스빠냐어 apartamiento 는 동사 apartar 를 명사화 시킨 것이구요. apartar 라는 에스빠냐어 동사는 위에서 처음 얘기했듯, « (여러 몫으로) 분리하다 » 라는 뜻입니다.

루브르궁에 보존되어 있는 황제 나뽈레옹 3세의 아빠르뜨멍 중 거실과 식당


mardi 27 octobre 2009

데빠르뜨멍 (département)

département 은 여러 뜻이 있는 단어인데, 그 중에는 프랑쓰 전역을 잘게 나눠 놓은 구역을 칭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도 정도에 해당하는 데빠르뜨멍은 사실상 우리나라의 도 보다는 크기가 작습니다. 데빠르뜨멍이 세네개 모이면 하나의 레지옹 (région), 즉 « 지역 » 이 되는데, 레지옹은 또 우리나라의 도보다는 더 큽니다. 따라서 정확하게 해당하는 번역어는 있을 수 없으며, 사실상 행정구역 명칭들도 대부분 고유명사처럼 쓰이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냥 데빠르뜨멍 이라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프랑쓰 전국은 정확하게 백 개의 데빠르뜨멍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그리고 각 데빠르뜨멍은 이름이 있을 뿐 아니라 고유한 번호를 부여받습니다. 01번은 앙 (Ain) 이고, 95번은 발-드와즈 (Val-d'Oise) 입니다. 그리고 에로 (Hérault) 는 34번을 가지고 있습니다. 프랑쓰 사람들 중에는 이 데빠르뜨멍들의 이름과 번호를 열심히 노력하여 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데빠르뜨멍을 아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100개의 데빠르뜨멍의 번호를 모두 정확하게 아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거든요. 프랑쓰의 자동차 번호에는 모두 그 차가 등록된 데빠르뜨멍의 번호가 포함되게 되어 있으므로, 사실 차 번호만 보아도, 이 차가 어느 데빠르뜨멍에서 온 차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때문에, 흔히 고속도로 등지에서 차가 밀릴 때, 옆의 차들의 번호판을 보면서 어느 데빠르뜨멍의 차인지 알아 맞히는 놀이 따위를 하기도 합니다.

데빠르뜨멍의 번호는 또한 우편번호에도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75011 이라고 하면, 이것만 보아도, 빠리 11구에 있는 주소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시 남의 우편번호를 보고 어느 데빠르뜨멍일지 짐작하는 놀이들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도시 하나에 데빠르뜨멍 번호를 부여하는 일은 없습니다. 한 데빠르뜨멍 안에는 크고 작은 도시가 수두룩 하지요. 유일한 예외가 바로 빠리인데, 빠리는 서울처럼 일종의 특별시이기 때문입니다. 빠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꼬뮌 (commune) 이면서 또한 그 자체로 하나의 데빠르뜨멍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방금 말했듯, 빠리의 번호는 75입니다.

프랑쓰에 백 개의 데빠르뜨멍이 있다면, 01부터 시작해서 100까지 차례대로 번호가 붙어야 할텐데, 엄격히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대다수는 그러합니다. 하지만 몇몇 예외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꼬르쓰 (Corse) 입니다. 우리나라의 제주도와도 같이, 프랑쓰 남쪽에 위치한, 그리고 프랑쓰의 가장 큰 섬인 꼬르쓰는 20번에 해당되는데, 그 자체가 다시 두 데빠르뜨멍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 오뜨-꼬르쓰 (Haute-Corse) 와 꼬르쓰-뒤-쒸드 (Corse-du-Sud). 차라리 Haute-Corse (높은 꼬르쓰) 와 Basse-Corse (낮은 꼬르쓰) 로 구별하든지, 아니면 Corse-du-Nord (북쪽 꼬르쓰) 와 Corse-du-Sud (남쪽 꼬르쓰) 로 구분하든지 했으면 좋았을 것을, 왜 이리 꼬아 놓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꼬르쓰 섬을 구성하는 두 데빠르뜨멍의 명칭은 이러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번호는 20이 아니라, 2B 와 2A 입니다.

그리고 프랑쓰는 네 개의 해외 데빠르뜨멍 (département d'outre-mer = DOM) 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중미의 엉띠으 제도 (Antilles) 에 두 개, 남미 대륙에 하나, 그리고 인도양에 하나. 이들은 두자리가 아니라 세자리 숫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971 = Guadeloupe, 972 = Martinique, 973 = Guyane, 974 = La Réunion. 이 네 개의 데빠르뜨멍은 비록 프랑쓰 본토 (France métropolitaine) 에서 멀리 있지만, 이름이 나타내듯, 다른 데빠르뜨멍과 동등하게 프랑쓰를 구성하는 정식 행정구역입니다. 이 해외 데빠르뜨멍도 공식적인 프랑쓰 영토에 속하며, 불어가 공식 언어이고, 외로 (euro) 가 공식 화폐이며, 이 지역에서 태어나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프랑쓰 국적과 선거권을 가집니다.

따라서 평범한 데빠르뜨멍 93 + 특별시 데빠르뜨멍 1 + 꼬르쓰 2 + 해외 데빠르뜨멍 4 = 100 이 됩니다.

참고로 département 이라는 단어는 불어동사 départir 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동사는 « part, 즉 각자의 몫에 맞게 나누다, 분배하다 » 라는 뜻입니다.

프랑쓰 본토의 데빠르뜨멍 지도

vendredi 23 octobre 2009

몽쁠리에 (Montpellier)

몽쁠리에에로 데빠르뜨멍의 수도 (chef-lieu) 이자, 렁그독-루씨용 (Langudoc-Roussillon) 지방의 수도이기도 한 프랑쓰 남부의 주요 도시입니다. 인구수로 볼 때도 프랑쓰에서 여덟번째로 큰 도시라고 합니다. 몽쁠리에는 바다와 접한 도시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중해와 매우 가깝기 때문에,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1년 내내 따뜻한 편이고, 해가 항상 화창한, 즉 많은 프랑쓰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Montpellier 라는 도시명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몽쁠리에는 실제로 언덕 위에 지어진 도시이기 때문에 mont 이 « 산 » 을 뜻하는 것은 분명하나, pellier 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난무할 뿐입니다 : « 헐벗은 산 » (mont pelé), « 처녀들의 산 » (mons puellarum), 등등. 학술적으로 가장 진지하게 여겨지는 설은 « 자물쇠 산 » 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 도시의 라띠나어 이름은 Mons pestelarium 이었는데, 비록 이 pestelarium 의 의미가 명확치 않으나, pessulus « 자물쇠 » 와 관계있을 것이라는 가정이지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몽쁠리에는 실제로 주변 지역의 통행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Montpellier 에 관한 또 한가지 특이한 점은 e 다음에 l 이 두 개 뒤따름에도 불구하고 [몽쁠리에] 라 발음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이렇게 발음되려면 l 이 하나만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l 이 두 개라면 [몽뻴리에] 로 발음되어야 하구요. 사실 몽쁠리에의 원래 이름, 즉 옥어 이름은 [몬뻴리에] 로 발음되었습니다. 아마도 불어로 변환되면서 l 의 발음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쁠라쓰 들 라 꼬메디 (Place de la Comédie) 를 제외하면, 몽쁠리에에서 특별히 볼 것은 없고, 전반적으로 너무너무 예쁜 도시라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살기에 상당히 쾌적해 보이는 곳이기는 합니다. 또 몽쁠리에는 중세부터 의대가 유명했는데, 지금까지도 몽쁠리에 1대학의 의학과는 큰 명성을 자랑합니다.

Place de la Comédie de Montpellier

dimanche 11 octobre 2009

에로 (Hérault)

에로프랑쓰 남부를 흐르는 강 (fleuve) 의 이름입니다. 약 150 km 길이의 이 강은 마씨프 썽트랄 (Massif Central) 의 남쪽에 있는 산 몽 떼구알 (Mont Aigoual) 에서부터 흘러나와, 갸르 (Gard) 와 에로 (Hérault) 두 데빠르뜨멍을 거친 후, 지중해로 빠집니다.

프랑쓰 남부에 위치해 있는 만큼, 원래 강의 진짜 이름은 옥어로 Erau [에라우] 였습니다. 지금은 불어화된 이름을 쓰는데, 앞에 무성 h 를 붙여 씁니다 (따라서 l'Hérault). hérauthéros 는 비록 유성 아쉬로 시작하기는 하지만, 사실상 발음되지 않으므로, Hérault 는 이들과 똑같이 발음됩니다.

에로 강은 에로 (Hérault) 라는 데빠르뜨멍에도 그 이름을 주었고, 또 끌레르몽-레로 (Clermont-l'Hérault) 라는 작은 도시에도 이름을 주기도 했습니다.

dimanche 20 septembre 2009

héraut « 사자 »

héros 의 h 가 유성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héraut 의 영향을 받아서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프렁씩어 heriwald 에서 유래한 héraut 는 1180년 경부터 불어에서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제르마닉 계열의 어원을 가지고 있는 만큼, 애초에는 h 가 발음되었을 것입니다. 1300년 경부터 héros 가 불어에 도입되었으므로, 이 때 héros 는 기존 어휘인 héraut 를 흉내내어 발음되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현대 불어에서 두 단어는 정확하게 똑같이 소리납니다.

héraut 라는 것은 중세 기사 (chevalier) 체제의 한 계급으로서, 왕이나 영주 등의 메싸쥬 (message) 를 전달하거나, 공식적인 선언문 등을 공표하는 역할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또한 중요한 행사나 의식 따위에서 순서를 알리고 진행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 때문에 흔히 나팔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곤 하지요.

이렇게 항상 어떤 일의 알림을 맡았었기 때문에, 오늘날 héraut 는 « 선구자, 전조 » 등의 뜻으로도 쓰입니다. 하지만 중세에 에로의 중요한 임무는 기사들의 문장 (blason) 을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귀족들은 자신이 속한 가문을 대표하는 문장을 방패와 깃발 등에 그려서 가지고 다녔는데, 기사들의 경기 (tournoi) 나 귀족들의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문장을 일일이 확인하고 어떤 가문의 누구인가를 재빠르게 파악하여 선포하는 것이 에로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문장을 연구하는 학문을 héraldique 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samedi 12 septembre 2009

héros, héroïne, héroïne, héro

« 영웅 » 을 뜻하는 불어 단어 héros 는 [에로] 처럼 발음됩니다. 즉 다른 모든 불어 어휘들처럼 첫글자 h 는 소리나지 않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전통에 의해, 마치 h 의 음가가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런 아쉬들을 유성 아쉬 (h aspiré) 라고 부르지요. 불어를 조금이나마 공부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렇게 유성 아쉬로 간주되는 단어들은 자음으로 시작하는 다른 단어들과 동등한 취급을 받습니다. 따라서 모음 축약을 하면 안되지요. 즉 정관사와 함께 쓸 때, *l'héros 라고 쓰면 절대 안되고, le héros 라고 써야하며, 발음도 [르] 잠깐 쉬고 [에로] 라고, 분명히 두 단어 사이를 띠어서 읽어야 합니다. 복수 les héros 도 [레 제로] 라고 리에종하여 읽으면 안되고, [레 에로] 라고 발음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요.

여기까지는 그런가보다 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나, 문제는 héros 의 여성형인 héroïne 입니다. 이 단어는 비록 héros 에서 파생된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무성 아쉬 (h muet) 로 시작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따라서 첫글자가 자음이 아니라 모음인 듯 여겨지는 것이지요. 즉 정관사와 붙여 쓰면 *la héroïne 이 아니라, l'héroïne [레로인] 이 되며, 복수 les héroïnes 은 [레 제로인] 이라고 연결하여 읽습니다.

그 뿐 아니라 형용사 héroïque « 영웅다운 », 부사 héroïquement « 영웅답게 », 또다른 파생 명사 héroïsme « 영웅으로서의 자질, 영웅다움, 용기 » 등등은 모두 무성 h 로 시작하는 단어입니다.

héroïne 은 « 여자 영웅 » 을 뜻하는 것 외에 전혀 엉뚱한 또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즉 모르핀에서 얻은 화학 약품 « 에로인 » 을 가리키지요. 화학적으로 보다 정확한 용어는 diacétylemorphine. 디아쎄띨모르핀이 이러한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이 약품을 취하면 영웅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해서 19세기 후반 독일에서 Heroin 이라 불린 것이 기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독어에서는 [헤로인], 즉 h 가 분명히 발음되는데도 불구하고, 불어에서는 h 가 무성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의미일 때도 역시 l'héroïne.

그리고 이 약물이 마약으로 널리 퍼지면서 그 명칭도 짧아져, 오늘날 젊은 프랑쓰 사람들은 흔히 héro 라고 부릅니다. 물론 h 는 여전히 무성이므로 축약하면 l'héro.

결국 알고 보면, 이 모든 파생어들의 원형인 héros 만이 예외인 셈입니다.

mardi 28 juillet 2009

제물포의 영웅들 (Les héros de Chemulpo)

오페라의 유령, 룰따비으 연작 등 많은 소설을 지은 갸스똥 르루 (Gaston Leroux) 는 그외에도 특이한 저작 하나를 남겼는데, 제목이 제물포의 영웅들 입니다. 졍르를 명쾌히 정의하기 힘든 이 책은 일종의 보고서 또는 증언록이라 말할 수 있는데, 거기에 약간의 소설적 요소가 가미되기도 했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오페라의 유령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빛이 바랜 느낌이 풀풀나고, 독창성이나 창조성이 돋보이기 보다는 그 유치함에 절로 살며시 미소가 떠오르게 되는, 그런 책입니다.

제목만 보면 100여년 전에 살았던 프랑쓰의 작가 르루가 한국을 알고 있었나 하는 궁금증을 유발하지만, 책을 몇 쪽만 읽고 나면, 한국은 전혀 그의 관심이 아니었음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제목의 제물포 는 인천을 가리키는 게 맞지만, 영웅들 이란 제물포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러시아 장교와 군인들을 칭송하는 용어인 것입니다. 1904 년 일본 측의 공격으로 우리 나라 인천 앞바다에서 일어난 제물포 전투는 러일전쟁의 시작이 되었으며, 당시 극동 지역에 주둔해 있던 많은 서구 세력들에게 목격되어 상당한 인상을 남긴 것 같습니다. 특히 선전포고도 없이 국제법을 어기면서, 중립지역이었던 제물포에서 러시아를 공격한 일본군의 만행에 많은 사람들이 놀란 듯 합니다. 그렇다면 르루도 그 중 한 명으로 한국에 와 있었던 것일까요 ? 그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기자였으니까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아니었습니다. 르루는 제물포 전투에서 살아 남아 돌아오던 러시아 군인들을 쒸에즈 운하 (Canal de Suez) 의 싸이드 항 (Port Saïd) 에서 만나, 그들의 배를 함께 얻어타고 마르쎄이으로 돌아오면서 군인들을 면담한 것이었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 러시아인들의 증언을 옮긴 것이지요. 그리고 그러면서 증언에 보다 생동감을 주려 했는지, 대화체와 소설적인 서술법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르루가 한국에 온 것도, 한국에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약간 아쉽지만, 그래도 책이 당시의 상황을 충실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좋은 역사 자료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소설적인 요소가 지나치게 가미되어 있어서, 어딘가 모르게 공정성, 정확성이 떨어집니다. 저는 동양 근대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이 책이 얼마나 정확하고 중요한 자료인지 엄밀히 판단할 수는 없으나, 책의 시작부터 르루 자신이 얼마나 고생을 하고, 애를 태우다가 어렵사리 싸이드 항에 도착하여 러시아인들을 만나게 된 것인지부터 시작하여, 책의 구성, 문체, 모든 것에서 당시 전투의 심각성보다는 그저 르루 본인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영웅으로 떠받드는 러시아 군인들에 대한 찬미와 칭송이 지나치게 두드러진 것 같아, 읽기가 거북했습니다.

또한 이 책에는 죠안쏜 (Ar. Johanson) 이라는 사람이 르루의 글을 묘사한 그림이 여러 장 함께 실려 있습니다. 글을 생생하게 전달한다는 핑계 하에, 이렇게 그림이나 삽화를 삽입하는 것이 당시에는 상당히 보편적인 관습이긴 했지만, 오늘날에는 어딘가 모르게 유치하고 어설프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마디로, 눈길을 끄는 제목과는 달리, 저에게는 그다지 흥미롭지 못한 책이었습니다. 하지만 극동의 현대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름 의미있는 자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mardi 30 juin 2009

오페라의 유령 (Le fantôme de l'Opéra)

갸스똥 르루 (Gaston Leroux) 는 룰따비으 (Rouletabille) 연작 외에도 여러 소설을 남겼는데, 유달리 유명한 작품 하나가 있으니, 바로 오페라의 유령입니다. 이 소설은 빠리의 오페라 극장 (갸르니에 궁) 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괴이한 사건들, 그리고 그 뒤에 숨은 낭만적인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한번쯤 읽어 볼만은 하지만, 뭐가 그리 재미있고 대단한 건지 개인적으로는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런데 이 소설이 무려 삼십여차례나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지요 ? 또한 뮤지컬 (comédie musicale) 로도 큰 인기를 모았었습니다. 그런에 여기서 특이한 것은, 이 중 프랑쓰 영화는 단 한 편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소설이 1910년 발표되었고, 소설을 주제로 한 첫 영화가 이미 1916년부터 나오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최근까지 거의 백여년간을 거치면서, 프랑쓰 사람들 중에는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입니다. 압도적인 대다수는 영미권 영화들입니다. 뮤지컬 역시 영국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 (Andrew Lloyd Webber) 가 작곡하여 런던과 뉴욕의 무대에 오르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해 봐도, 불어로 된 자료들은 그저, 이러한 소설이 있었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정도의 단순한 정보들을 반복하는데 불과하는데 비해, 영어로 된 싸이트들 중에는 이 소설에 — 보다 정확히 말하면 소설의 주제에 거의 광적으로 열광하고 있는, 각양각색의 정보들이 넘쳐납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신비롭다 못해 기괴한 분위기, 빠리 오페라 극장이라는 어딘가 모르게 낭만적인 장소, 게다가 그 건물의 수백미터 지하에서 펼쳐지는 환상적인 세계, 거기에다 추리적인 색채와 냉소적인 유머까지... 이 모든 것이 영미권 문화의 전통적인 문학 소재였던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이런 것이 일종의 문화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물론 프랑쓰에도 이런 소재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이 소설은 어딘가 모르게 프랑쓰답지 못합니다. 설사 프랑쓰 작가가 불어로 쓴 작품이라고 해도 말이지요. 그리고 사실 외국인들은 원작을 직접 읽어 볼 기회가 드물어서, 아마 문학작품으로서 오페라의 유령 보다는, 그 전체적인 주제와 줄거리에만 집착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실제로 원작을 읽어 보면, 그렇게 큰 감흥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문체는 너무 오래되어 색바랜 느낌이 물씬 풍기고, 줄거리는 너무 황당무계하여 현실감이 없습니다. 게다가 마치 실제로 갸르니에 궁에서 일어났던 일을 보고하듯이, 드문드문 실존 인물들의 이름을 인용하면서, 쓰고 있는데, 혹시 당시의 독자들에게는 먹혔을지 몰라도, 지금 다시 읽기에는 너무 유치하고 설득력이 없습니다.

아무튼 아래 동영상은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중 유명한 이중창을 싸라 브라이트만 (Sarah Brightman) 과 안또니오 반데라쓰 (Antonio Banderas) 가 부른 것입니다. 한때 작곡가의 부인이기도 했던 브라이트만은 뮤지컬의 초연에서 여주인공 크리스띤 다에 (Christine Daaé) 역을 맡은 이후 이 역할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반데라쓰는 이 뮤지컬에 출연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아는데, 아마 특별한 기회에 아래와 같은 자리가 마련된 것 같습니다. 원래 오페라의 유령 에릭 (Érik) 은 너무 추하게 생겨 가면을 쓰고 다니는데, 안또니오 반데라쓰는 그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잘 생긴 것 같군요. 그리고 음역이 너무 높다고 생각됩니다. 다른 남자 가수들이 부른 걸 들어 보면 훨씬 저음이던데... 그래도 반데라쓰가 노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드문 기회인 것 같습니다.

mercredi 10 juin 2009

룰따비으 (Rouletabille)

땅땅하면 저는 어딘가 모르게 룰따비으가 생각납니다. 룰따비으도 프랑쓰 사람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허구 속의 인물로, 역시 취재보다는 사건 해결에 집중하는 젊은 기자입니다. 다만, 땅땅이 만화의 주인공인 반면, 룰따비으는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룰따비으는 프랑쓰의 작가 갸스똥 르루 (Gaston Leroux, 1868-1927) 가 만들어낸 인물로, 노란 방의 비밀 (Le Mystère de la chambre jaune, 1907) 이라는 책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그 후 이 책의 후속편이랄 수 있는 검은 옷을 입은 부인의 향기 (Le Parfum de la dame en noir, 1908) 에도 등장하지요. 그외에도 르루는 룰따비으가 등장하는 추리소설들을 여러권 발표하였습니다 (총 여덟 편).

이 인물의 원래의 이름은 죠제프 죠제팡 (Joseph Joséphin) 인데, 룰따비으는 일종의 별명처럼 쓰입니다. 불어를 아는 사람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RouletabilleRoule ta bille, 즉 « 너의 구슬을 굴려라 » 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bille 는 직역하면 « 구슬 » 이지만, 때로는 사람의 동그란 « 머리 » 를 칭하기 위해 사용되는 대중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이름을 « 머리를 굴려라 » 라고 이해하면 더 재미있겠지요. ^^

실제로 소설에서 룰따비으는 매우 동그란 머리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고, 특히 이마가 넓어서 더욱 동글동글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 동그란 머리를 굴려서 복잡한 사건들을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지요. 에르제가 그린 땅땅 역시 매우 동그란 머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룰따비으의 이야기들은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었고, 텔레비젼 연속극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근에 프랑쓰에서 다시 룰따비으 바람이 분 것은 2003년에 브뤼노 뽀달리데쓰 (Bruno Podalydès) 가 노란 방의 비밀을 다시 연출하면서이지요. 여기서 룰따비으 역할은 유명 배우이자 브뤼노의 동생인 드니 뽀달리데쓰 (Denis Podalydès) 가 맡았습니다. 사실 소설 속 룰따비으는 18세인데, 드니 뽀달리데쓰가 이 역할을 연기했을 때 그의 나이는 마흔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니 뽀달리데쓰는 소설 속의 묘사처럼 동그란 머리와 똘망똘망한 눈빛을 갖고 있는 배우였기 때문에, 이 역할에 나름대로 잘 어울렸다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어린 배우를 쓴 것보다 더 현실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드니 뽀달리데쓰 이외에도 이 영화에는 프랑쓰의 수많은 명배우들이 등장했습니다 : 싸빈 아제마 (Sabine Azéma), 삐에르 아르디띠 (Pierre Arditi), 미꺄엘 롱달 (Michael Lonsdale), 끌로드 리슈 (Claude Rich)... 이들 대부분이 같은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후속작 검은 옷을 입은 부인의 향기 (2005) 에도 등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저는 개인적으로 르루의 소설들이 혀를 내두를 만큼 치밀하게 짜여진 추리소설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영화는 나름대로 독특한 유머가 돋보여서 재미있었습니다.

노란 방의 비밀의 예고편 (bande-annonce)

mardi 2 juin 2009

뒤뽕과 뒤뽕 (Dupond et Dupont)

만화 연작 땅땅과 밀루의 모험 속에는 땅땅과 밀루 외에도 뗄레야 뗄 수 없는 두 명의 짝꿍이 등장합니다. 뒤뽕 (Dupond) 과 뒤뽕 (Dupont) 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은 형사들인데, 항상 땅땅이 다 해결해 놓은 사건에 뒤늦게 끼여들어 일을 조금 망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두 사람은 매우 흡사한 외모와 똑같은 옷차림에, 행동과 말투도 꼭 쌍둥이 같습니다. 하지만 이름이 보여주듯, 이들은 쌍둥이는 커녕 한 형제도 아닙니다. 이들을 한꺼번에 통칭할 때는 les Dupondt 이라고 부릅니다.

너무나 닮은 두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콧수염입니다. 뒤뽕 (Dupond) 은 이름의 끝자 D 를 90도 눕힌 모양의 콧수염을 하고 있고, 뒤뽕 (Dupont) 은 이름의 끝자 T 를 180° 뒤집은 모양의 콧수염을 하고 있습니다.

뒤뽕과 뒤뽕

위 그림에서 왼쪽에 있는 사람이 뒤뽕 (T),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뒤뽕 (D) 입니다.

땅땅의 만화가 여러 언어로 번역되면서 고유명사들도 재미나게 번역이 된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뒤뽕과 뒤뽕의 이름은 말장난적인 특성 상 어떻게 각 나라 말로 번역되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중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영어 : Thomson and Thompson (톰쓴과 톰쓴)
독어 : Schulze und Schultze (슐츠와 슐츠)
에스빠냐어 : Hernández y Fernández (에르난데스와 페르난데스)
라띠나어 : Clodius et Claudius (끌로디우쓰와 끌라우디우쓰)

dimanche 31 mai 2009

땅땅 (Tintin)


땅땅아스떼릭쓰뤼끼 뤽과 더불어 대표적인 불어 만화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뤼끼 뤽과는 달리 땅땅은 100 % 벨직 만화이지만, 역시 프랑쓰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고, 대외적으로는 마치 프랑쓰 만화인 것처럼 알려져 있습니다.

에르제 (Hergé) 가 쓰고 그린 이 만화 연작들의 정확한 제목은 땅땅과 밀루의 모험 (Les aventures de Tintin et Milou) 으로, 땅땅은 그 주인공 소년 — 또는 청년의 이름입니다. 땅땅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림으로만 보면 상당히 어려 보이는데, 하는 일을 보면 어른입니다. 그는 신문기자로 일하며, 독립적으로 삽니다. 가족은 전혀 언급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신문 기자라는 직업 때문에 취재를 떠난 땅땅이 여러 사건과 음모, 그리고 모험에 휘말리는 것이 만화의 주된 내용입니다 (이 점에서 땅땅은 룰따비으와 매우 닮았습니다). 용감한 땅땅은 항상 정의를 위해 싸우는데, 그러다가 위기에 처하면, 영리한 강아지 밀루의 도움으로 곤경에서 빠져 나옵니다. 이데픽쓰와 더불어 프랑쓰에서 가장 유명한 강아지 중 하나인 밀루는 똑똑하고 주인에 대한 충실함에 있어서도 이데픽쓰에 뒤질 바가 없습니다.

밀루를 제외하면 땅땅은 의외로 친구가 별로 없습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의 주변에 여럿 등장하지만, 모두 나이가 많은 어른들입니다. 아독 선장 (Capitaine Haddock), 뚜른쏠 교수 (Professeur Tournesol), 뒤뽕과 뒤뽕 (Dupond et Dupont), 까스따피오르... 그 때문에, 땅땅의 실제 나이를 도대체 몇살 정도로 보아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었습니다. 또한 여자 성악가인 비엉꺄 꺄스따피오르 (Bianca Castafiore) 를 제외하면, 모두가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 어른들 뿐입니다. 여기서부터 땅땅을 동성애자로 보는 관점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땅땅의 세계와 에르제의 시각이 지나치게 식민주의적이고 때로는 인종차별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자주 있었습니다.

이토록 땅땅은 그저 어린이들이 즐겨 보는 만화로 끝나지 않고, 다양한 문학적, 사회학적 해석과 논쟁을 낳을 만큼 수많은 관심을 받아왔습니다. 이렇게 땅땅에 관심을 갖고 땅땅을 좋아하고, 땅땅의 알범은 물론, 땅땅과 관련된 모든 물건을 모으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신조어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 tintinophile. 이 때 -phile 은 « 좋아하는 » 을 뜻하는 접미사이지요.

1929년에 처음 출간된 땅땅 연작은 1983년 에르제의 죽음과 함께 끝을 맺었습니다. 몇몇 다른 만화가들과 달리 에르제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만화를 이어서 그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미완성으로 남은 제 24권 땅땅과 알프-아르 (Tintin et l'Alph-Art) 가 마지막 알범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죽기 직전 에르제는 땅땅을 영화로 만드는 권한을 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에게 팔았습니다. 땅땅은 이미 몇차례 영화로 만들어지긴 했는데, 사실 만화만한 재미는 없습니다. 스필버그는 현재 땅땅을 만들고 있는데, 정확하게 영화도 아니고, 정확하게 만화도 아닌, 둘을 약간 혼합한 일종의 합성 영상 형태로 제작하고 있다고 합니다. 과연 스필버그가 에르제의 선을 얼마나 살리면서 영화의 잇점도 활용할지는 2011년이 되어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mardi 19 mai 2009

뤼끼 뤽 (Lucky Luke)

뤼끼 뤽아스떼릭쓰와 더불어 불어권 만화의 대표작입니다. « 불어권 » 이라고 한 것은 이 만화의 국적을 정확히 프랑쓰라고만 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화의 극본과 대화는 프랑쓰 작가 르네 고씨니 (René Goscinny) 가 썼지만, 그림은 벨직의 화가 모리쓰 (Morris) 가 그렸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연작은 1946 년부터 벨직의 만화 잡지 스삐루 (Spirou) 에 연재되기 시작하였지만, 1967 년부터는 프랑쓰의 만화 잡지인 삘롯 (Pilote) 에 연재되었습니다. 그리고 단행본들 역시 처음에는 벨직의 출판사 뒤쀠 (Dupuis) 에서 나오다가, 프랑쓰의 출판사 다르고 (Dargaud) 로 판권이 넘어갔으며, 현재는 뤼끼 꼬믹쓰 (Lucky Comics) 라는 출판사에서 계속 발행되고 있습니다. 이미 극본가와 만화가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 계속 » 발행이 되고 있다고 한 것은, 예전 알범들이 재판되는 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2001년부터 프랑쓰의 만화가 아쉬데 (Achdé) 와 프랑쓰의 유명한 희극인 (humoriste) 인 로렁 줴라 (Laurent Gerra) 가 대본을 써서, 새로운 뤼끼 뤽 연작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연작의 정확한 제목들은 모리쓰에 의한 뤼끼 뤽의 새로운 모험들 (Les nouvelles aventures de Lucky Luke d'après Morris) 입니다.

뤼끼 뤽은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미국인을 주인공으로 합니다. 정확히는 미국의 서부를 외로이 방황하는 카우보이의 이야기이지요. 그는 카우보이이지만 사실 보안관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특히 그는 달똔 형제들과 끊임없이 만나게 되는데, 번번이 그들을 체포하여 감옥으로 보냅니다. 하지만 달똔 형제들은 또 번번이 감옥에서 탈출하여 한 탕 하려다가 또다시 뤼끼 뤽과 마주치게 되는 이야기의 반복입니다. 달똔 형제들이 감옥을 매번 탈출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갖혀 있는 감옥을 지키는 개가 렁떵쁠렁 (Rantanplan) 이기 때문입니다. 렁떵쁠렁은 오벨릭쓰의 강아지 이데픽쓰땅땅 (Tintin) 의 강아지 밀루 (Milou) 와 더불어 매우 유명한 만화 속 강아지의 하나지만, 앞의 두 강아지와는 달리 매우 어리석은 개입니다. 뤼끼 뤽 만화에서 렁떵쁠렁은 « 서부에서 가장 멍청한 동물 (l'animal le plus bête de l'Ouest) », 또는 « 자연의 실수 (l'erreur de la nature) » 라 불립니다. 하지만 뤼끼 뤽은 그러한 렁떵쁠렁을 귀여워 해 줍니다.

뤼끼 뤽 만화에 등장하는 또다른 주요 동물로 뤼끼 뤽의 충실한 친구인 그의 말 (cheval) 죨리 점뻬르 (Jolly Jumper) 가 있습니다. 이 말은 렁떵쁠렁과는 정 반대입니다. 이 말은 매우 똑똑해서 안장을 직접 등에 얹거나 걷어 내기도 하고, 신발끈도 묶을 줄 알며 장기도 둘 줄 압니다. 또한 시도 읊을 줄 알고 철학적인 논의도 합니다. 이 말은 똑똑하기만 할 뿐 아니라, 서부에서 가장 빠른 말 (le cheval le plus rapide de l'Ouest) 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기차보다도 빠르지요.

죨리 점뻬르의 주인 뤼끼 뤽 역시 매우 빠른 사람입니다. 그의 별명은 « 자기 그림자보다 더 빨리 총을 쏘는 사나이 (l'homme qui tire plus vite que son ombre) ». 뤼끼 뤽은 그동안 종이 만화 (bande dessinée) 외에도 수많은 만화 영화 (dessin animé), 그리고 실제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들로도 제작되었습니다. 올해에도 새로운 뤼끼 뤽 영화가 나올 예정이라네요. 이번에는 졍 뒤쟈르당 (Jean Dujardin) 이 주인공 역을 맡는다고 합니다. 뒤쟈르당은 만화 속 뤼끼 뤽과는 별로 닮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카우보이 역할에 잘 어울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mardi 24 mars 2009

달똔 형제들 (Les Dalton)

죠 다쌍관따나메라 몇 년 뒤 달똔 형제들 이라는 재미있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기서 달똔 형제들이란 실존했던 네 명의 인물, 즉 로버트, 그랫, 빌, 에멧 (Robert, Grat, Bill, Emmet) 을 가리킵니다. 달똔 (또는 미국식으로, 돌튼) 집안의 이 네 형제는 1890 년대 초반, 미국 남부에서 은행과 기차 강도로 악명 높았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프랑쓰에서는 사실 더 유명한 달똔 형제들이 있습니다. 각각 죠, 윌리암, 작, 아브렐 (Joe, William, Jack, Averell) 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네 명의 달똔 형제는 고씨니 (René Goscinny) 와 모리쓰 (Morris) 의 만화 뤼끼 뤽 (Lucky Luke) 에 자주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들입니다.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연작 만화에서 네 명의 달똔 형제는 진짜 실존했던 달똔 형제들의 사촌들로 나옵니다. 그리고 이들은 끊임없이 범죄를 저지르고 싶어하지만 멍청하기 때문에 번번이 감옥에 갇히고 말죠. 하지만 번번이 감옥에서 탈출해 나와 카우보이 뤼끼 뤽과 맞부닥치고, 또다시 감옥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합니다.

1946년부터 발행된 뤼끼 뤽 연작은 프랑쓰와 벨직 등 불어권 국가에서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죠 다쌍이 이 노래를 불렀을 때 (1967) 도 멍청한 달똔 형제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사실은 실존 달똔 형제들에 대한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결국 많은 사람들은 만화 속의 달똔 형제들 이야기로 생각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창법이나 가사를 볼 때, 이미 노래의 작가들 (Dassin, Rivat, Thomas) 도 의도적으로 그러한 혼돈을 꾀한 것 같습니다. 아래의 비디오를 보아도, 모리쓰가 그린 그림과 비슷하게 생긴 네 명의 달똔 형제들이 등장합니다.

죠 다쌍이 부르는 달똔 형제들 (Les Dalton)

samedi 7 février 2009

관따나메라 (Guantanamera)

관따나메라죠 다쌍의 초기 히트곡 중 하나입니다 (1965). 물론 이 노래는 죠 다쌍보다 훨씬 이전 (1928) 에 호쎄이또 페르난데스 (Joseíto Fernandez) 가 불러서 유명해졌으며, 그 후로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여러 나라 판이 꾸준히 소개되어 왔지요. 이 노래의 원래 제목은 Guajira guantanamera, 즉 « 관따나모 (Guantánamo) 의 과히라 » 였는데, 차차 제목이 줄어 오늘날은, 그리고 죠 다쌍이 이 노래의 불어판을 불렀을 무렵에도 이미 관따나메라라고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에스빠냐어 (보다 정확히는 꾸바어) guajira 는 « 시골 여자 » 라는 뜻이 있기에, 이 노래도 때로는 « 관따나모의 시골 처녀 » 라고 번역되기도 하나, 여기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과히라는 사실 전형적인 꾸바 음악의 한 졍르로서, 일종의 대중적인 시골 민요를 말합니다. 물론 « 시골 여자 » 를 뜻하는 guajira 와 « 시골 민요 » 를 뜻하는 guajira, 두 단어는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bergamasque 가 « 베르가모에서 노래한 춤곡 » 과 « 베르가모 여자 » 를 동시에 칭하는 것처럼. 아무튼 볼살이 포동포동한 젊은 죠 다쌍이 부르는 관따나메라를 들어보세요.



dimanche 1 février 2009

죠 다쌍 (Joe Dassin)

외국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듯 하지만, 프랑쓰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가수로 죠 다쌍 (Joe Dassin) 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 출신이지만, 거의 모든 활동을 프랑쓰에서 했습니다. 영화감독 쥘 다쌍 (Jules Dassin) 의 아들이기도 한 그는 아버지가 마꺄르띠슴 (maccarthysme) 의 횡포로 망명하게 되면서, 유럽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교육을 받았고, 결국 그르노블에서 고등학교 졸업장 (baccalauréat) 을 땄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불어를 전혀 억양 없이 말할 줄 알며, 미국에서 대학을 다닌 후에도 결국은 프랑쓰로 되돌아와 가수로 데뷔했습니다. 죠 다쌍은 육십년대와 칠십년대 동안 프랑쓰와 불어권 국가들에서 엄청난 인기를 모았으며, 여전히 인기가 한창이던 1980년에 불행히도 41세의 나이로 급사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사라진지 삼십여년 가까이 되는 지금까지도 프랑쓰에서는 그의 노래들이 여전히 인기가 있으며, 그의 전기가 쏟아져 나오고, 텔레비젼에서도 툭하면 죠 다쌍 특집, 죠 다쌍 히트곡 모음, 죠 다쌍의 숨겨진 인터뷰 발굴... 따위의 프로그람들을 방송하곤 합니다.

다쌍은 단지 한 두 곡의 히트곡을 낸 사람이 아닙니다. 이루 셀 수가 없지만 최소한 사십 곡은 됩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가 부른 노래들이 대부분 음악적으로 단순한, 말그대로 대중 유행가 (chanson populaire) 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때문에 다쌍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현학적인 음악보다는, 사람들의 가슴에 쉽게 와 닿는 노래가 좋은 노래라는 믿음을 가졌던 가수였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노래들이 유치하거나 저속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처음 들어도 친숙하게 들리고, 금방 외워지고, 따라부르기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슬픈 노래들이지요. 그의 노래들은 즐거운 가사에 즐거운 리듬을 가지고 있어도, 항상 약간의 우울함이 젖어 있습니다. 가사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들 역시 일상 생활입니다 : 아침마다 빵 사러 가는 얘기 (Le petit pain au chocolat), 자동차가 밀려서 짜증나는 얘기 (Bip-bip, La complainte de l'heure de pointe) 모기가 물어서 귀찮다는 투정 (Le moustique), 프랑쓰에서 유명한 만화책 속의 주인공들 (Les Dalton) ... 그리고 물론 동서고금 유행가들의 영원한 주제, 사랑을 노래한 곡도 많지요.

재미있는 것은 그의 노래 대부분이 영미권 노래의 편곡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원곡들은 거의 단 한 곡도 유명세를 탄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불어 가사가 붙고, 약간의 편곡이 가해진 후 죠 다쌍에 의해 불려지면, 발표되는 족족 프랑쓰에서 큰 인기를 모았던 것이지요. 그 중 몇 곡은 프랑쓰에서 너무 유명해지자 오히려 대표적인 프랑쓰 노래로서 원래의 나라에 또는 전 세계에 재수출 되기도 했습니다. 그 중 한 곡이 레 셩-젤리제 (Les Champs-Élysées) 입니다. 프랑쓰 문화에 전혀 관심없는 사람들도 누구나 알 법한 이 노래는 사실은 윌쉬 (Wilsh) 와 데이건 (Deighan) 이라는 사람들이 작사작곡한 워털루 로드 (Waterloo Road) 라는 영국 노래였다고 합니다. 삐에르 들라노에 (Pierre Delanoë) 가 개작한 불어판 가사는 아브뉘 데 셩젤리제에 가면 원하는 게 다 있다 라는 단순하고 유쾌한 내용입니다.

죠 다쌍이 부르는 레 셩-젤리제

vendredi 30 janvier 2009

셩-젤리제 (Champs-Élysées)

자칭 타칭 전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la plus belle avenue du monde) 이라고 불리는 셩-젤리제는 빠리 중앙으로부터 서쪽을 향해 길게 뻗은 대로 (avenue) 를 말합니다. 정확한 행정 구역 이름은 avenue des Champs-Élysées 이며, 쁠라쓰 들 라 꽁꼬르드 (place de la Concorde) 와 쁠라쓰 샤를-드-골 (place Charles-De-Gaulle), 두 광장을 이어주는, 길이 약 2 킬로미터, 폭 약 70 미터의 길입니다. 빠리의 길들은 대부분 좁고 구불구불하기 때문에 셩-젤리제처럼 곧고 넓은 길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밖에 없긴 하지만, «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 이라는 것은 너무 광고문안적인 표현이 굳어진 것 아닌가 합니다. 혹시 옛날에는 더 아름다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넓게 트인 길에 가로수가 끝이 안 보이게 줄지어 있고, 인도도 매우 넓어서 산책하기에 쾌적한 길이었을테니까요. 사실 이미 18세기에도 이 동네를 빠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역의 하나라고 묘사한 문서들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점들, 은행들, 식당들, 여행사들이 너무 많이 들어 차 있어서, 과연 이 길만의 독창적인 아름다움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나마 예전에는 최고급 상점들 위주라 희귀성이라도 있었지만, 요즘은 전세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체인 상표들이 셩-젤리제를 수 놓고 있습니다.

셩-젤리제에서 그나마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부위는 꽁꼬르드 광장부터 롱-쁘왕 데 셩-젤리제 (rond-point des Champs-Élysées), 즉 아브뉘의 한 중간 정도까지입니다. 여기도 물론 차도에는 차들이 씽씽 달리지만, 양 옆 인도는 정원으로 꾸며져 있고, 인도의 폭이 거의 삼사백미터에 가깝도록 넓직하기 때문에 산책하는 맛이 있습니다. 물론 셩-젤리제의 나머지 부위도 빠리의 보도로서는 정말 넓은 편이지만, 관광객들로 미어 터지고, 소매치기들의 활약이 많으며, 잡상인들로 들끓기 때문에, 발디딜 틈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셩-젤리제 — 또는 빠리 사람들이 줄여 말하듯 셩 (Champs) — 에 가면, 알 수 없는 흥분과 때로는 « 감동 » 까지 느끼게 되는 것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괜히 술렁이는 분위기 때문이겠지만요. 특히 11월 말부터 가로수에 성탄절 장식을 했을 때는 정말 엘리제 (Élysées) 들판 (champs) 에 온 듯한 기분도 듭니다. 엘리제 들판은 그리쓰 신화에서 영웅들과 착한 사람들이 죽은 후 가게 되는, 일종의 천국과 같은 장소를 말하지요. 여기서부터 이 길의 이름이 왔으며, 그 외에도 프랑쓰에는 엘리제라는 이름을 딴 장소나 명소가 여러 군데 있습니다 (ex. Palais de l'Élysée).

아브뉘 데 셩-젤리제는 매년 7월 14일 군인들의 행진 장소로 쓰이고, 또 매년 여름 뚜르 드 프렁쓰 (Tour de France = 프랑쓰 일주 자전거 대회) 의 종착지로도 쓰이며, 그 외에도 특별한 행사들, 주로 화려한 축제 분위기의 행사들이 종종 열립니다. 공식적인 행사 외에도 나라에 즐거운 일이 있을 때는 빠리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뛰쳐나와 모여드는 곳도 셩-젤리제랍니다.

셩-젤리제의 성탄 장식

꽁꼬르드 광장의 오벨리스크 위에서부터 개선문 쪽을 향해 바라 본
아브뉘 데 셩-젤리제source de cette photo

mercredi 28 janvier 2009

엘리제 궁 (Palais de l'Élysée)

오뗄 마띠뇽프랑쓰 수상의 공식 관저라면, 프랑쓰 대통령의 공식 관저는 엘리제 궁입니다. 엘리제 궁도 갈리에라 궁처럼, 사실 궁이라기 보다는 오뗄 빠르띠뀔리에라 보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 오뗄 마띠뇽과 비슷한 시기 (1722) 에 완성된 이 집은 그 첫주인인 에브르 백작 (Comte d'Évreux) 의 이름을 따서 한동안 오뗄 데브르 (Hôtel d'Évreux) 라고 불렸으며, 바띨드 도를레엉 (Bathilde d'Orléans), 즉 부르봉 공작 부인의 소유이던 시절에는 오뗄 드 부르봉 (Hôtel de Bourbon) 이라고도 불렸습니다. 프랑쓰 혁명으로 재산을 많이 잃게 된 바띨드 도를레엉은 오방 (Hovyn) 이라는 상인과 손을 잡고, 자신의 저택 1층과 정원을 대중에게 공개하였습니다. 이 때 여기에 일반인들이 많이 드나들면서, 저택의 위치가 아브뉘 데 셩-젤리제 (avenue des Champs-Élysées) 와 가깝다하여, 엘리제 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엘리제 궁은 공식적으로는 제 2 공화국 시절부터 프랑쓰 대통령의 공식 거처로 지정되었으나, 대통령으로 뽑힌 나뽈레옹 3세가 황제로 둔갑하면서, 역사적으로 진짜 왕궁이었던 뛰일르리로 옮겨 가 버리는 바람에, 엘리제 궁이 실제 역할을 발휘하게 된 것은 1873년 이후부터입니다. 이후로는 지금까지 프랑쓰의 모든 대통령들이 엘리제 궁에서 집무를 보고 생활을 하나, 대통령 관저로서 적합치 않다는 주장이 여러 차례 나왔습니다. 엘리제 궁이, 위에서 말했듯 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작고, 관광객으로 들끓는 셩-젤리제 바로 옆, 상점들이 즐비한 좁고 긴 거리 (rue du faubourg saint-Honoré) 에 위치해 있는 데서 생기는 여러 안전 문제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대통령이 뽑힐 때마다 이사 계획이 논의되다가도, 번번이 무산되고 마는데,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알 수가 없지요. 엘리제 궁 역시 문화유산의 날들 같은 드문 기회에 일반인의 구경을 허락합니다.

삼색기가 휘날리는 엘리제 궁의 정문source de la photo

lundi 26 janvier 2009

오뗄 마띠뇽 (Hôtel Matignon)

마리아 브리뇰레-쌀레 (Maria Brignole-Sale) 는 갈리에라 궁 외에도 빠리 시내에 또하나의 화려한 오뗄 빠르띠뀔리에 (hôtel particulier) 를 소유했었습니다. 그 첫 소유자였던 쟉 드 마띠뇽 (Jacques III de Matignon) 의 이름을 따서 오뗄 마띠뇽이라고 불리는 이 건물은 1725년에 완성된 이래, 상속과 판매를 통해 끊임없이 주인을 바꾼 뒤, 1848년 라파엘레 데 페라리 (Raffaele de Ferrari) 의 소유가 됩니다. 이 사람이 바로 갈리에라 공작 (duc de Galliera) 이며, 마리아 브리뇰레-쌀레의 남편입니다. 당시 유럽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으며, 빠리에서 리용을 거쳐 마르세이으까지 가는 철도를 놓기도 한 갈리에라 부부는 갈 곳 없는 필립 도를레엉 (Philippe d'Orléans) 과 그 가족들에게 오뗄 마띠뇽의 1층을 내주기도 했습니다. 당시 프랑쓰는 꼬뮌 드 빠리를 거친 후 제 3 공화국 시절을 보내고 있었는데, 왕위 계승자 (prétendant au trône) 임을 자칭하는 필립 도를레엉은 자신의 조상들과는 달리, 왕궁에서 생활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던 중 필립 도를레엉의 맞딸 아멜리 도를레엉 (Amélie d'Orléans) 이 뽀르뛰갈의 인판떼 까를로쓰 (Carlos ou Charles) 와 약혼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갈리에라 부인은 1886년 5월 14일, 오뗄 마띠뇽에서 매우 성대한 잔치를 열었고, 여기에는 삼천여명의 귀족들과 왕정파들이 초대받았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오뗄 마띠뇽이 위치해 있는 뤼 드 바렌 (rue de Varenne) 이 마차와 자동차로 미어 터졌는데, 하필 그 때 죠르쥬 끌레멍쏘 (Georges Clemenceau) 의 차 역시 이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급진 좌파 국회의원으로 이름을 얻고 있던 끌레멍쏘는 호사스럽게 차려 입은 왕정주의자들이 오뗄 마띠뇽 앞에 길게 줄을 지어 늘어 서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추방법을 제안하게 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 또는 이 때의 차막힘에 휘말려 든 것은 끌레멍쏘의 차가 아니라 당시 국무총리였던 샤를 드 프레씨네 (Charles de Freycinet) 의 차라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전설적인 일화를 떠나, 그 다음날부터 신문들, 특히 르 피갸로 (Le Figaro) 같은 우파 신문들이 오뗄 마띠뇽에서 있었던 왕정주의자들의 모임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제 3 공화국 정부는 추방법의 통과를 급하게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말했듯, 추방법으로 오를레엉 일가가 망명길에 오르게 되자, 갈리에라 부인은 갈리에라 궁과 자신의 예술품을 프랑쓰에 기여하는 것을 거부하게 됩니다. 대신 갈리에라 궁은 빠리 시에, 예술품은 제노바 시에, 오뗄 마띠뇽은 외스터라이히의 황제에게 기증하고 죽습니다.

외스터라이히 측은 오뗄 마띠뇽을 잠시 재불 대사관으로 사용했으나, 1차 대전의 발발로, 두 나라는 적군이 되며, 프랑쓰는 오뗄 마띠뇽을 적군의 재산으로 압수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수많은 교섭 끝에, 오뗄 마띠뇽은 1922년부터 프랑쓰 국가의 소유가 되며, 1935년 이후로는 국무총리의 공식 관저가 됩니다. 1958년부터는 제 5 공화국의 출범으로 정부 체제가 조금 바뀌게 되어, 국무총리 (président du Conseil) 대신 수상 (premier ministre) 이 내각의 우두머리가 되고, 오뗄 마띠뇽은 지금까지도 프랑쓰 수상의 사무실이자 그 가족들이 먹고 살고 자는 숙소로 쓰이고 있습니다.

오뗄 마띠뇽은 대부분의 다른 오뗄 빠르띠뀔리에와 마찬가지로 넓은 뒷정원을 가지고 있는데, 빠리 시내에서 대중에게 개방된 공원들을 제외하면 가장 넓다고 합니다. 그리고 1976년 수상으로 임명된 레몽 바르 (Raymond Barre) 이래 역대 모든 수상들은 이 정원에 자신이 원하는 나무를 한 그루씩 심는 전통이 생겼다고 합니다. 물론 평소에는 오뗄 마띠뇽과 그 정원은 일반인에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유산의 날들이나 하얀 밤 같은 특별한 행사 때는 개방되기도 합니다.

Hôtel Matignon
source de la photo

dimanche 25 janvier 2009

갈리에라 궁 (Palais Galliera)

도쿄 궁 바로 맞은 편에는 갈리에라 궁이 있습니다. 샤이오 궁이나 도쿄 궁과 마찬가지로 이 건물 역시 왕궁으로 쓰였던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앞의 두 궁에 비하면 보다 구체제와 관련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갈리에라 궁은 갈리에라 공작부인이었던 마리아 브리뇰레-쌀레 (Maria Brignole-Sale, 1812-1888) 가 19세기 말에 빠리 서쪽에 짓게한 개인 저택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식의 개인 저택은 palais 보다는 hôtel particulier 라고 칭하는 경우가 더 많지만, 이 건물은 palais 라는 이름으로 굳어졌습니다. 사실 크기도 궁이라고 하기에는 좀 자그마합니다.

갈리에라 부인은 이 궁에 자신이 수집한 예술 작품들을 보관할 예정이었으며, 사망시, 건물과 예술품 모두를 프랑쓰에 기증할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추방법 (loi d'exil) 이 공표되자, 마음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추방법이란 이전의 왕족과 황족 및 그 직계 후손들이 프랑쓰 공화국에 체류하는 것을 금지할 목적으로, 1886년에 만들어진 법입니다. 이딸리아의 귀족부인이었던 마리아 브리뇰레-쌀레는 사실상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었지만, 왕정에 호의적이었고, 필립 도를레엉 (Philippe d'Orélans, 당시 프랑쓰 왕위 요구자) 과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웠기에, 오를레엉 가문을 쫓아낸 프랑쓰에 자신의 재산을 기증할 마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궁 만은 결국 — 프랑쓰가 아닌 — 빠리 시에 기증하고 죽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이 건물은 빠리 시의 시립 의상 박물관 (Musée de la mode et du costume) 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갈리에라 궁source de la photo

jeudi 15 janvier 2009

도쿄 궁 (Palais de Tokyo)

불어 palais 는 흔히 « 궁 » 으로 번역되는데, 이것이 항상 « 왕궁 » 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palais 는 왕궁은 물론, 그에 준할 만큼 « 크고 화려한 건축물 » 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예의 하나가 여러 박물관을 품고 있는 샤이오 궁입니다. 그리고 샤이오 궁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도쿄 궁이라 불리는 건물이 있습니다. 이 궁 역시 1937년의 세계 박람회를 치루기 위해 지어졌으며, 샤이오 궁처럼 대칭을 이루는 두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Palais de TokyoSource de la photo

현재 도쿄 궁은 현대 미술관으로 사용되는데, 여기에는 사실 두 개의 미술관이 있습니다. 하나는 빠리 시에서 운영하는 빠리시 현대 미술관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이고, 또하나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현대 창작의 장 (Site de création contemporaine) 입니다. 빠리시립 현대 미술관썽트르 뽕삐두 (국립) 와 함께 프랑쓰의 주요 현대 미술관의 하나이며, 현대 창작의 장은 이러한 박물관들보다 훨씬 다양하고 실험적인 현대 미술, 그리고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예술 (상업용 디자인, 의상, 비데오 놀이 등) 에까지 개방된 전시 공간입니다.

도쿄 궁이라는 이름은 물론 일본의 수도로부터 왔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이 건물이 위치한 길의 이름이, 궁이 건축되던 1937년 당시에는 avenue de Tokio 였기 때문에 붙었습니다. 이 길의 이름은 현재는 avenue de New York 입니다. 아브뉘의 이름이 de Tokio 에서 de New York 으로 바뀐 때는 바로 1945년 ! 이것은 전혀 우연이 아닙니다. 2차대전시 일본은 프랑쓰의 적이었고, 미국은 프랑쓰가 독일군에게서 해방되는 데에 큰 도움을 준 나라였지요. 그 때문에 길의 이름은 바뀌었지만, 건물의 이름은 어쩌다 보니 그대로 남았습니다. 다만 현재는 철자가 조금 바뀌어 de Tokyo 라고 씁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에는 일본의 수도명을 Tokio 라 쓰는 것이 유럽 여러 나라에서 관행이었다고 합니다.

dimanche 11 janvier 2009

샤이오 궁 (Palais de Chaillot)

샤이오 궁은 빠리의 서쪽, 트로꺄데로 광장 (Place du Trocadéro) 에 위치한 대형 건물로, 궁이라고 불리지만 왕이 살았던 것은 아니고, 1937년 빠리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 (exposition universelle) 를 치루기 위해 지어진 건축물입니다. 현재는 인류 박물관 (Musée de l'Homme), 해양 박물관 (Musée de la Marine), 샤이오 국립 극장 (Théâtre national de Chaillot), 건축과 문화재 도시 (Cité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등이 들어서 있습니다. 프랑쓰 씨네마떽 (Cinémathèque française) 도 오랜 세월을 샤이오 궁에서 보냈는데, 이제는 독립된 건물로 이사를 나갔습니다.

활짝 펼친 두 개의 날개 모양으로 이루어진 샤이오 궁은 외모는 비교적 단순한 편이나, 그 거대함이 사람을 압도합니다. 그리고 약간 언덕진 곳에 지어졌기 때문에, 샤이오 궁에서부터 쎈 강을 향해 내려다 보는 전망이 시원합니다.

에펠탑에서부터 내려다 본 샤이오 궁과 트로꺄데로 정원source de la photo

샤이오 궁을 이루는 두 날개 사이에는 훤하게 트인 넓은 떼라쓰 (terrasse) 가 판판하고 튼튼하게 잘 닦여 있어, 롤러 스케이트 (patins à roulettes) 등의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며, 관광객으로도 항상 붐빕니다. 1948년 12월 10일, 국제 연합 (ONU) 이 세계 인권 선언 (Déclaration universelle des Droits de l'Homme) 을 한 곳이 바로 샤이오 궁인 까닭인지, 인권을 건드리는 문제들이 발생하면 프랑쓰 사람들은 흔히 이 떼라쓰에 모여 시위를 하곤 합니다.

샤이오 궁과 쎈 강 사이는 정원으로 꾸며져 있으며 (Jardin du Trocadéro), 가운데 길에는 넓은 분수가 펼쳐져 있어, 여름에는 사람들이 물놀이를 즐기기도 합니다. 떼라쓰에서부터 이 분수를 따라 내려온 후 이에나 다리 (Pont d'Iéna) 를 통해 쎈 강을 건너면, 바로 에펠탑입니다.

트로꺄데로 정원

samedi 10 janvier 2009

엉리 렁글르와 (Henri Langlois)

몽빠르나쓰 묘지의 서쪽 끝 델핀 쎄릭의 무덤에서부터 아브뉘 뒤 노르 (Avenue du Nord) 를 따라 동쪽으로 걷다 보면, 진 쎄베르그의 무덤, 리꺄르도 므농의 무덤을 지나 엉리 렁글르와 (1914-1977) 의 무덤에 이르게 됩니다. 이 무덤은 주변의 다른 무덤들과는 달리 유리, 또는 유리를 닮은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다는 특징이 돋보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여러 영화의 장면들이 투사되어 있지요.

Tombeau d'Henri Langlois
렁글르와의 무덤이 이렇게 꾸며진 이유는 그가 프랑쓰 씨네마떽 (Cinémathèque française) 의 창시자였기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영화광이었던 그는 사비를 들여, 버려져 가고 있던 무성영화 필름들을 수집하기 시작했으며, 1936년 몇몇 친구들과 함께 프랑쓰 씨네마떽을 창설하였습니다. 지금도 씨네마떽은 비록 국가의 보조를 받기는 하지만, 여전히 개인 모임 형태라고 합니다. 하지만 1950년 이후로 프랑쓰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영화는 반드시 씨네마떽에 한 부를 기증해야 하므로, 애초에 약 150편으로 출발했던 씨네마떽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대규모의 필름보관소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프랑쓰 영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씨네마떽 측에서 사들이거나 수집한 세계 각국의 다양한 작품들로 넘쳐 납니다.

씨네마떽은 영화들을 수집할 뿐 아니라, 오래된 필름들을 복원하고, 새로운 영화의 제작도 활발히 후원하고, 소장하고 있는 영화들을 가지고 다양한 프로그람을 짜서, 쉽게 접하기 힘든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특히, 훗날 누벨 바그라고 불리게 될 감독들이 씨네마떽을 열심히 드나들며 영화를 배웠다고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8년에는 렁글르와 사건 (affaire Langlois) 이라는 상당히 심각한 소동이 일어났었다고 합니다. 두 달 동안 프랑쓰 영화계를 뒤흔든 이 사건은 국가가 렁글르와를 씨네마떽에서 배출시키려는 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쓰의 거의 모든 영화관계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으며, 여기에 외국의 유명 감독들까지 렁글르와를 지원하였으나, 프랑쓰 정부 측은 폭력 진압으로 맞섰습니다. 결국 두 달 간의 혼란을 겪고 나서 정부가 손을 들었는데, 이 때가 바로 1968년 4월 중순이었습니다. 즉 5월 시위가 터지기 2주 전이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렁글르와는 프랑쓰 씨네마떽의 총서기장 (secrétaire général) 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사실 이게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지에 대해 후회의 의견도 많이 나왔습니다. 그는 36년 씨네마떽의 설립 이후로 77년 사망할 때까지, 68년 2월에서 4월까지의 두 달을 제외하고는 씨네마떽의 책임자로 있었는데, 한 사람이 한 자리에 너무 오래 있으면, 아무래도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겠지요. 정부가 그를 쫓아 내려 했던 것도 씨네마떽의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보조를 해 줘도 항상 빚에 허덕이고 있기에, 사람을 바꿔 보려고 생각했던 것이랍니다. 영화에 대한 렁글르와의 사랑을 아는 영화인들은 여기에 민감하게 대응했지만,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렁글르와는 행정적인 업무에는 실제로 매우 둔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렁글르와에 대한 비판도 꽤 있지만, 그래도 영화라면 닥치지 않고 수집하던 그의 열정만은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평가입니다.

렁글르와의 무덤 위에는 샤이오 궁 (Palais de Chaillot) 의 축소판이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프랑쓰 씨네마떽이 오랫동안 샤이오 궁 안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베르씨로 자리를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