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anche 17 janvier 2010

필립 오귀스뜨 (Philippe Auguste)

필립 2세 (Philippe II) 또는 필립 오귀스뜨프랑쓰의 영토 확장과 왕권 강화에 큰 역할을 한 왕입니다. 루이 7세 (Louis VII) 가 세 번의 결혼 끝에 얻은 유일한 아들인 필립은 태어나면서부터 왕위를 잇는 것이 확정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아버지의 살아 생전에 이미 왕으로서 축성을 받았습니다 (1179). 비록 바로 그 다음 해에 루이 7세가 사망하긴 하지만, 짧은 기간이나마 프랑쓰는 공식적으로 두 명의 왕이 다스린 셈이 되지요. 축성을 받았을 때 필립의 나이는 14살이었으며, 15살부터는 단독으로 프랑쓰의 왕 필립 2세가 됩니다.

당시의 프랑쓰 및 유럽의 정치 체제는 봉건주의 (féodalisme) 로서, 이것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이론적으로는 많은 귀족들이 프랑쓰의 왕에게 복종하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귀족들은 매우 자율적으로 자신들의 영지를 다스렸습니다. 따라서 프랑쓰 왕의 직접적인 권한은 오늘날 빠리와 일-드-프렁쓰 (Île-de-France) 를 둘러싼 극히 작은 지방에 밖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지요. 특히 영국의 왕은 이론적으로 프랑쓰 왕의 신하였으나, 영국 섬은 물론 프랑쓰 내에 그보다 더 넓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프랑쓰의 남서쪽, 북서쪽, 북쪽 등등이 모두 영국 왕의 영지였지요. 따라서 프랑쓰는 상당히 위기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필립 2세가 단독으로 다스리게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이자벨 드 에노 (Isabelle de Hainaut) 와의 결혼이었고, 이 공주는 결혼 선물로 아르뜨와 (Artois) 지방을 필립에게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첫 영토 확장을 시작한 필립 오귀스뜨는 계속해서 술책과 정책, 전쟁과 외교를 통하여 프랑쓰의 영토를 넓히는데 일생을 바칩니다. 특히 프랑쓰 내의 영국 영토를 빼았기 위해 그는 영국 왕자들이 그들의 아버지인 엉리 2세 (Henri II) 에게 일으킨 반란을 후원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엉리 2세의 아들 리샤르 (Richard) 가 영국의 왕이 되자, 이번엔 그와 그의 동생인 졍 (Jean) 사이를 이간질 시켰습니다. 또한 후사없이 죽은 리샤르를 뒤이어 졍이 왕이 되자, 그가 프랑쓰 내에 소유했던 영토를 하나하나 다 빼앗았습니다. 그 때문에 졍은 흔히 졍 썽 떼르 (Jean sans Terre) 즉 « 땅없는 졍 »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엉리 2세와 리샤르, 졍 등은 모두 프랑쓰 출신인 쁠렁따쥬네 가문의 사람들로, 불어와 옥어를 모국어로 사용했습니다. 이들은 비록 영국이라는 섬의 일부를 다스리기는 했지만 영어를 전혀 몰랐으며, 영국의 왕인 동시에 노르멍디 공작, 엉주 백작, 멘 공작, 쁘와뚜 백작, 아끼뗀 공작으로써, 대부분 프랑쓰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프랑쓰에 묻혔습니다.)

영국의 왕으로부터 빼앗은 땅 이외에도 필립 2세는 여러 지역을 차지하여 오귀스뜨 (Auguste) 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그가 죽을 무렵 (1223) 에는 프랑쓰 왕의 소유지가 현대 프랑쓰의 거의 3분의 2 정도가 될 정도로 확장되었습니다. 이렇게 영토가 넓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필립 오귀스뜨는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펼쳐 왕국 전체를 통일적으로 다스리는 데 성공했으며, 도시 시민들 (bourgeois) 을 장려함으로써, 봉건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왕권을 강화시켰습니다.

필립 오귀스뜨는 또한 수도 빠리를 확장시키고 아름답게 꾸미는 데도 많은 정성을 들였습니다. 진흙 바닥이었던 빠리의 길은 돌로 포장이 되었고,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성벽이 축조되었습니다. 바로 이 성벽을 쌓으면서 루브르 (Louvre) 궁도 지어졌습니다. 또한 빠리의 중앙에 거대한 시장을 만든 것도 바로 이 왕으로, 이 시장은 1969년까지 지속되었고, 빠리의 여러 학교들을 모아 공식적으로 빠리 대학 (Université de Paris) 의 지위를 준 것도 필립 2세였습니다.

현재도 남아 있는 필립 오귀스뜨의 성벽의 유적
(Reste de l'enceinte Philippe Augus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