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redi 24 mars 2010

마르그릿 드 프로벙쓰 (Marguerite de Provence)

블렁슈 드 꺄스띠으가 아들 루이 9세에게 보인 모성애는 약간 소유욕적인 면모가 없지 않은데, 특히 며느리와의 관계에서 그것이 잘 드러납니다. 아들이 성인 (adulte) 이 된 이후로도 여전히 어린애 취급을 하며 정사를 직접 주관하던 블렁슈는 1234년 루이 9세가 스무살 되던 해에 어쩔 수 없이 짝을 찾아주기로 합니다. 프랑쓰에 새로운 왕비가 있어야 하니까요. 아버지 루이 8세는 열세 살에 결혼했고, 할아버지 필립 오귀스뜨는 열다섯 살에 결혼한 것에 비하면, 루이 9세는 꽤 늦게 결혼한 셈입니다. 이 때 블렁슈가 아들의 아내감으로 선택한 여자는 프로벙쓰의 공주였던 마르그릿이었습니다. 1221년에 프로벙쓰의 백작 레몽-베렁제 5세 (Raymond-Bérenger V) 와 베아트리쓰 드 싸브와 (Béatrice de Savoie) 사이의 장녀로 태어난 마르그릿은 결혼 당시 13살이었습니다. 열세 살이면 당시로서는 결혼 적령기이도 했지만, 블렁슈가 그녀를 선택한 진짜 이유는 남편이 될 루이와 나이차가 일곱 살이나 나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이미 성인이 된 루이가 마르그릿을 여자로 보기보다는 그저 어린 아이로 볼 것이라는 기대였죠. 그리고 열세 살 짜리 며느리라면 시어머니의 말에도 고분고분할 것이었고, 블렁슈의 권위에 감히 대들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었습니다. 엄격히 말하자면 현직 왕 루이 9세가 아내를 맞이하면 그의 비가 공식적인 왕비가 되니까, 블렁슈 자신은 뒷자리로 물러나야 마땅할 것이었습니다. 공식석상에서 현직 왕비에게 자리를 내 주는 것보다도 블렁슈는 사석에서 아들에게 미치는 자신의 영향력이 며느리 때문에 줄어들지나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프로벙쓰는 아직 프랑쓰령이 아니었는데, 정략결혼을 통해 이 지역을 합병하려는 정치적 속셈도 물론 숨어 있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블렁슈의 계산 중 단 하나도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루이와 마르그릿은 처음에는 좀 어색한 사이였지만, 그건 서로 얼굴도 모른 채 정략결혼해야 하던 사이로서는 당연한 것일테고, 오히려 곧 금실좋은 잉꼬부부가 됩니다. 마치 블렁슈 자신과 루이 8세 사이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훗날 성인 (saint) 으로 추앙될 루이 9세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왕비의 거처를 드나들어서, 어머니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합니다.

또한 한낱 어린 아이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따라서 아무런 정치적 판단력도, 자신의 뚜렷한 주관도 없을 것이기에 쉽게 조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마르그릿 드 프로벙쓰는 매우 똑똑하고, 다방면에 지식이 풍부했으며, 의지가 분명했고, 시어머니의 권력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마르그릿은 루이 9세와 블렁슈 자신 만큼이나 신심 깊은 생활을 하였기에, 도덕성 측면에서도 나무랄 데가 없었으며, 19세 되던 해부터 시작하여 무려 열 한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따라서 왕비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 즉 프랑쓰의 후손을 잇는 임무도 쉽게 완성한 것입니다.

또한 마르그릿의 아버지 레몽-베렁제는 프로벙쓰가 마르그릿의 결혼과 함께 프랑쓰로 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장녀가 아닌 막내딸에게 영토를 상속시킵니다.

따라서 블렁슈는 마르그릿 드 프로벙쓰로부터 얻으려던 것을 사실상 단 하나도 성취하지 못합니다.

jeudi 18 mars 2010

블렁슈 드 꺄스띠으 (Blanche de Castille)

루이 8세의 왕비였던 블렁슈 드 꺄스띠으 (1188-1200-1252) 는 프랑쓰 역사상 최초의 여자 섭정 (régente) 이었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섭정 기간 (régence) 을 가졌습니다. 첫번째는 남편 루이 8세가 갑자기 죽고 아들 루이 9세가 아직 어린 시절이었을 때, 또 한번은 루이 9세가 성인 (adulte) 이 된 후에 십자군 전쟁을 떠나있던 기간이었습니다.

꺄스띠야 (Castilla = Castille) 의 인판따였던 블랑까 (Blanca = Blanche) 는 열 두 살의 나이에 훗날 프랑쓰의 왕이 될 루이 8세와 결혼하게 되어 프랑쓰로 옵니다. 그리고 이 어린 부부는 남매처럼 함께 자라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믿고 사랑하게 됩니다. 사실상 유럽 왕가의 정략 결혼 중에서 이렇게 행복한 결혼은 역사를 통틀어서 별로 찾아 보기 힘들지요. 오랜 세월을 왕세자로만 보냈던 루이 8세는 왕이 되자마자 알비 십자군 전쟁을 치루러 왕궁을 떠났으므로, 블렁슈는 사실상 이미 남편이 살아 있던 시절부터 빠리에 머물면서 실질적인 정치를 했습니다. 물론 아내를 완전히 믿는 남편의 허락 하에 그러했던 것이지요.

루이 8세가 왕이 된지 3년 만에 숨을 거두면서 어린 아들 루이 9세의 섭정으로 그 어머니인 블렁슈 드 꺄스띠으를 지칭함으로써 그녀는 공식적으로 프랑쓰의 최고 권력을 쥐게 됩니다. 그 이전에도 프랑쓰에 섭정이 있었던 적은 두어번 있었으나, 여자에게 섭정권을 준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블렁슈는 1226년 루이 8세가 숨을 거둔 때부터 1235년 루이 9세가 성인 (adulte) 으로 공표될 때까지 9년간 프랑쓰를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 이미 남편이 죽기 전부터 정치에 참여했고, 아들이 성인이 된 후에도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에, 그녀가 실권을 행사한 기간은 더 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세력을 제대로 정착시키지도 못한 채 루이 8세가 죽고, 어린 아이가 왕이 되고, 여자가 권력을 잡게 되자, 여기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 또는 이 틈을 타 대세를 뒤집어 보려던 귀족들이 여러 차례 크고 작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정치술과 판단력, 결단력이 매우 뛰어났던 블렁슈는 모든 반란을 다 진압하고 왕권을 오히려 강화시켰습니다. 그녀는 또한 남편이 참여했던 알비 십자군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지어 뚤루즈 백작령 (comté de Toulouse) 의 절반 이상을 프랑쓰령으로 합병하였습니다.

루이 9세와 블렁슈 드 꺄스띠으의 관계는 매우 애틋했던 것 같습니다. 블렁슈는 장남 (엄격히는 장남이 아니지만 위의 세 형이 모두 어린 나이에 죽었으므로) 루이 9세를 다른 아들들 보다 끔찍히 여겼던 것 같고, 매우 신심 깊고 곧은 성격이었던 루이 9세는 어머니를 무척 공경했습니다. 그리하여, 성장한 루이 9세는 독자적으로 정치를 하면서도 어머니의 의견을 자주 참고했고, 1248년 제 7 차 십자군 전쟁을 떠나면서는 공식적으로 블렁슈 드 꺄스띠으를 프랑쓰의 섭정으로 임명합니다. 이 때 블렁슈의 나이는 60살이었지요. 그런데 에집트로 떠났던 루이 9세가 결국 그곳에서 포로로 잡히고 맙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프랑쓰에서는 목동들의 반란 (révolte des pastoureaux) 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가난한 목동들, 초라한 농민들이 왕을 구하러 가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면서 시작되었으나, 결국 특권층에 대한 봉기로 돌변합니다. 처음에는 자기 아들을 구하러 가겠다는 백성들의 열정에 감동받았던 블렁슈는 이것이 반란으로 돌아서자 엄하게 진압합니다.

번번이 그녀의 섭정 기간마다 반란이 있었고 그걸 성공적으로 다스렸기에, 블렁슈 드 꺄스띠으는 무섭고 냉정하고 표독한 여자로 그려지기도 했고, 남편과 아들로부터 왕권을 빼았을 정도로 권력을 좋아한 여자라는 인상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으며, 며느리 마르그릿 드 프로벙쓰와의 관계 때문에 악독한 시어머니로 알려져 있지만, 역사학자들은 그녀가 상당히 현실적인 정치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매우 균형있게 나라를 다스린 것으로 평가합니다. 싫든 좋든 그녀는 프랑쓰 최초의 여왕이라 할 만합니다. 쌀릭법 때문에 여자는 왕이 될 수 없었던 프랑쓰에서 그녀는 사실상 왕이나 다름 없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목동들의 반란을 진압한지 얼마 되지 않아 블렁슈는 64살의 나이에 숨을 거둡니다. 십자군 전쟁을 떠난 루이 9세, 그녀가 집착에 가까울 만큼 사랑했던 아들은 다시 보지 못한 채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