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24 janvier 2011

떵쁠리에의 저주 (Malédiction du templier)

떵쁠회의 마지막 수장 (grand maître) 이었던 쟉 드 몰레 (Jacques de Molay) 는 동료 몇몇과 함께 1314년 3월 18일 억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빠리의 노트르 담 앞마당에 마련되었던 화형대에서 불길에 휩싸여 죽어가며 쟉 드 몰레가 떵쁠회를 파탄으로 몰아 넣은 프랑쓰의 왕 필립 4세 르 벨과 이것이 모함임을 알면서도 도와 주지 않은 교황 끌레멍 5세를 저주했다고 합니다. 매우 놀랍게도, 쟉 드 몰레가 죽은지 꼭 한 달 만에, 즉 4월 19일 밤에, 교황 끌레멍 5세가 죽습니다. 또한 같은 해 11월 20일에 필립 4세가 뇌졸중으로 갑자기 사망합니다.

또한 쟉 드 몰레는 필립 4세 뿐 아니라, 그 자손 대대로에게까지 화가 있으리라 예언했다고 하는데, 프랑쓰 왕위를 이은 필립의 큰 아들 루이 10세 르 위땅 (Louis X le Hutin) 이 2년 만에 갑작스럽게 죽고 맙니다. 루이 10세의 아들 졍 1세 (Jean Ier) 는 이미 루이 10세가 죽은 후 태어났기에, 태어나면서부터 프랑쓰의 왕위에 올랐으나, 5일 만에 숨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졍 1세의 삼촌이자, 루이 10세의 동생, 즉 필립 4세의 둘째 아들이 필립 5세 (Philippe V) 라는 이름으로 왕이 됩니다. 그는 왕좌를 차지하기 위하여 여자들이 왕위를 잇지 못하게 하는 쌀릭법을 제정하기도 하였지만, 5년간의 통치 끝에 딸만 넷을 남긴 채 죽습니다. 그 때문에 자신의 후손 중 어느 누구도 왕위를 잇지 못하고 대신 동생, 즉 필립 4세의 셋째 아들인 샤를 4세 (Charles IV) 가 왕위에 오르지만, 그 역시 6년의 통치 후 아무 자식 없이 죽습니다. 이로써 필립 4세의 세 아들은 모두 왕위에 올랐지만 모두 비교적 단기간 내에 죽었으며, 이상하게도 아들만 왕이 될 수 있다는 법을 정한 후부터 아들은 전혀 태어나지 않아, 꺄뻬씨앙 (Capétiens) 직계 왕조는 프랑쓰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또한 그 와중에 세 왕의 부인들, 즉 각각 마르그릿 드 부르고뉴 (Marguerite de Bourgogne), 쟌 드 부르고뉴 (Jeanne de Bourgogne), 그리고 블렁슈 드 부르고뉴 (Blanche de Bourgogne) 가 합동으로 젊은 귀족들을 끌어 들여 간통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이 세 왕비들은 모두 삭발을 당한 채 감금되어 살다가 처참하게 죽고 맙니다. 실제로 쟉 드 몰레가 화형대에서 저주를 내뱉었는지는 전혀 확인할 수 없으며, 이렇게 프랑쓰 왕가에 닥친 일련의 불운한 사건들이 훗날 사람들에게 그러한 저주가 있었다고 상상을 하게 한 듯 싶습니다. 특히 모리쓰 드뤼옹 (Maurice Druon, 1918-2009) 의 소설 저주받은 왕들 (Les Rois maudits) 이후로 이 사건은 매우 대중적인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총 일곱 권의 대하소설인 이 연작은 프랑쓰에서 매우 큰 인기를 끌었고, 텔레비젼 씨리즈로도 두 차례나 만들어진 적이 있습니다 (1972, 2005).

꺄뻬씨앙의 직계 후손이 끊긴 이후, 프랑쓰의 왕권을 두고 많은 논란이 오고 간 후, 결국은 사촌 가문인 발르와 왕조의 필립 6세 (Philippe VI de Valois) 가 왕이 되는데, 이것을 시비 삼아 영국에서 프랑쓰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전쟁이 백여년간이나 지속되었으니, 정말로 쟉 드 몰레의 저주가 있었다면 아주 지독하고 긴 저주임에는 분명합니다. 백년 전쟁 말기가 되어서야 겨우 하늘에서 보냈다는 쟌 다르크 (Jeann d'Arc) 가 나타나 프랑쓰를 구원하지요. 그런데 쟌 다르크도 충실히 섬겼던 프랑쓰 왕의 버림을 받고, 모함에 몰려, 조작된 증거물들로 꾸며진 거짓 재판을 받은 후, 이단자로 낙인 찍혀 화형대에서 죽습니다. 백여년 전 쟉 드 몰레와 매우 비슷한 운명을 겪은 것이지요.

lundi 17 janvier 2011

떵쁠리에 (Templiers)

떵쁠리에들은 12세기부터 14세기까지 활동했던 기사 (chevalier) 이자 수사 (moine) 였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1차 십자군 전쟁의 성공으로, 유럽인들은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고, 그동안 금지되었던 성지 순례가 다시 가능하게 되기는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험은 도처에서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1118년, 위그 드 빵 (Hugues de Payns) 이라는 기사가 다른 여덟 명의 동료를 모아 « 그리스도의 작은 기사들 » (Pauvres chevaliers du Christ) 이라는 조직을 만듭니다. 이들은 유럽에서부터 도착하는 순례자들을 항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안전하게 경호하는 역할을 했고, 이것은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아, 예루살렘의 왕 보두앙 2세 (Baudouin II de Jérusalem) 는 자기가 살던 궁의 일부를 이 가난한 기사들에게 내어줍니다. 보두앙 2세가 살던 궁전은 그 옛날 (기원전 10세기) 쌀로몽 왕이 지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자리에 있었기에, 성전 즉 Temple 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하여 1119년부터 이들은 « 떵쁠의 기사 (chevaliers du Temple) » 또는 « 떵쁠리에 (Templiers) » 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떵쁠리에들의 특징은 기사이면서 동시에 수사와 같은 삶을 살려고 한 데 있습니다. 창립된 지 꼭 십년 째 되던 해에 (1128), 이미 그 수가 매우 불어난 이 군사-종교적 조직은 트르와 공의회 (Concile de Troyes) 에서 교황으로부터 정식으로 수도회 인가를 받고, 고유한 규칙과 의상 등을 정합니다. 이후로 점점 더 번성한 떵쁠회 (Ordre du Temple) 는 예루살렘 왕국과 그 주변은 물론 유럽 각국에도 수많은 분원을 세웠습니다. 프랑쓰에만 삼천여 개에 이르렀다고 하지요. 빠리의 떵쁠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수도원 외에도 이들은 성과 군사적 요새들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떵쁠회는 군사적 조직이긴 했지만, 군인이라고 해서 모두 다 싸움만 할 수는 없는 것처럼, 떵쁠리에들 중에서도 일부 만이 말을 타고 칼과 창을 쓰는 기사였고, 다른 많은 떵쁠리에들은 수도원이 운영될 수 있도록 여러가지 다른 업무를 맡아 생활했습니다. 특히 씨또회 (Ordre de Cîteaux) 의 영향을 많이 받은 떵쁠회는 직접 농경지를 가꾸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는 일을 주요 임무로 생각했습니다. 떵쁠리에들의 이러한 검소한 모습과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는 용감한 모습, 그리고 순례자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희생적인 모습 등이 복합되어, 떵쁠리에들은 많은 인기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떵쁠리에들은 놀랍게도 은행가의 역할도 했습니다. 어찌 보면 오늘날의 어음이나 수표 등을 발명한 사람이 떵쁠리에들인 셈인데, 멀리 바다 건너 예루살렘까지 순례를 떠나는 사람들이 몇 년에 걸치는 여행 기간 동안 현금을 들고 다니기가 겁이 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럽에 있는 떵쁠 아무 곳이나 찾아가 자신들의 경비를 맡겼고, 대신 그것을 증명해 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후 빨레스띤에 도착한 다음 또다시 아무 떵쁠이나 찾아가 그 증서를 내밀면 그에 해당하는 현금을 내어 주었습니다. 이 씨스템은 반드시 유럽과 빨레스띤 사이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같은 지역 내에서도 활용되었으며, 또한 자신들의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도 용감한 군인인 동시에 검소한 떵쁠리에들에게 돈이나 보석, 보물을 맡기고 관리해 주기를 청했습니다. 심지어 프랑쓰의 왕도 자신의 개인 재산을 떵쁠리에들에게 맡겼으며, 여러 지방에서 거두는 세금 따위가 모두 빠리의 떵쁠에 도착하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국세청과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이 모든 것이 떵쁠리에들의 돈이 아니었지만, 점차로 사람들 사이에서는 떵쁠리에들이 본연의 모습을 버리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것처럼 보여졌습니다. 더군다나 수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 끝에 결국은 유럽인들이 1291년 빨레스띤에서 철수하고 나서는, 더이상 떵쁠리에들은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순례자를 보호한다는 원래 의무가 없어졌으니까요. 따라서 한때 많은 인기를 누리고 존경을 받았던 떵쁠리에들이 점점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307년 10월 13일, 프랑쓰 전국의 모든 떵쁠리에들이 일제히 왕명으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떵쁠리에들을 갑자기 체포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전국의 모든 떵쁠리에들을 동시에 체포했다는 것은, 이 사건이 매우 치밀하게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온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이 체포를 명한 필립 4세 르 벨 (Philippe IV le Bel) 은 부족한 국고를 채우기 위해서, 떵쁠리에들이 축적한 것으로 믿어지는 어마어마한 부를 빼앗을 생각이었습니다. 게다가 떵쁠리에들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도 부정적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치밀한 준비 끝에 이러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 때 교황으로 선출된 지 얼마 안 된 끌레멍 5세 (Clément V) 가 교회의 수사들을 함부로 잡아 들인 것에 대해 어느 정도 형식적인 반감을 표했지만, 끌레멍 5세도 사실은 애초에 프랑쓰 왕권의 힘으로 교황의 자리에 올랐던 사람입니다. 그는 보르도의 주교였고, 처음으로 로마에 가기를 거부하고 아비뇽 (Avignon) 에 머문, 프랑쓰 출신의 교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문에 못이긴 떵쁠리에들이 스스로 죄를 고백하는 바람에 교황도 명목을 잃었습니다. 고문 끝에 자백한 떵쁠리에들의 죄상은 그리스도 모독, 우상 숭배, 성물과 성직 매매, 음란한 비밀 의식, 동성애, 등등 이루 말도 안되는 것들이었으며,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필립 르 벨과 그의 측근들은 이것을 합법적으로 통과시키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결국 7여년에 걸친 재판 끝에 떵쁠회는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떵쁠회의 마지막 수장 쟉 드 몰레 (Jacques de Molay) 는 이단자의 선고를 받아 1314년 3월 18일 노트르 담 (Notre Dame)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집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떵쁠리에들을 화형시키거나 고문 끝에 죽였지만, 필립 4세는 결국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떵쁠의 재산은 위에서 말했듯 그들의 개인 소유물이 아니라 위탁된 것이었으며, 떵쁠 고유의 재산은 떵쁠회가 해체된 후 오삐딸회 (Ordre de l'Hôpital) 를 비롯한 다른 수도원들에서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떵쁠의 진짜 보물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고 믿는 전설이 생겨나 지금까지도 소설이나 영화, 놀이의 주제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역시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떵쁠리에들이 실제로 은밀한 의식을 행하던 비밀 종교 조직이었으리라는 낭만적인 상상과, 쟉 드 몰레가 죽으면서 퍼부었다는 저주가 모두 들어맞으면서 떵쁠리에들은 일종의 신화가 되었습니다. 

dimanche 9 janvier 2011

떵쁠 (Temple)

렁발 공주가 프랑쓰 왕가와 함께 생의 마지막 날들을 보낸 떵쁠의 탑 (Tour du Temple) 은 떵쁠의 집 (Maison du Temple) 을 구성하던 한 건축물이었습니다. 떵쁠의 집은 중세에 떵쁠리에 (Templier) 들이 오늘날의 빠리의 3구에 해당하는 지역에 세운 넓은 공간으로, 중세에는 거의 독립된 도시와도 같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떵쁠리에들은 십자군 전쟁 시 순례자들의 안전을 위해 활동했던 수사이자 군인이면서, 은행가의 역할까지 담당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애초에 떵쁠회 (Ordre du Temple) 는 예루살렘의 성전 (Temple) 이 있던 자리를 첫 본거지로 삼은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는데, 크게 번성하여 유럽 도처에 분원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각각을 떵쁠의 집이라 불렀지요. 빠리의 떵쁠도 그 중 하나로, 다른 떵쁠의 집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는 넓은 농지로 구성되었습니다. 흔히 떵쁠리에들을 군인이나 은행가로만 보지만, 실제로는 다른 수사들처럼 땅을 경작하는 일에도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따라서 농사에 관계된 여러 부속 건물들 (곳간, 마굿간 등등) 이 있었으며, 빠리의 떵쁠은 사각형의 거대한 탑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늪과 습지에 불과했던 이 지역은 빠리의 외곽으로서, 떵쁠리에들은 상당히 넓은 영토를 소유할 수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을 성벽으로 둘러 쌓아 요새화 시켰습니다.

1450년 경의 떵쁠을 묘사한 그림

하지만 1312년 프랑쓰의 왕 필립 4세 르 벨 (Philippe IV le Bel) 과 교황 끌레멍 5세 (Clément V) 가 떵쁠회를 폐지시키면서, 떵쁠회의 재산과 소유지는 모두 오삐딸회 (Ordre de l'Hôpital) 로 넘어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리의 떵쁠은 여전히 떵쁠이라 불리면서 여러 변화를 거치지요. 우선 빠리 시내가 커지면서 떵쁠이 빠리 시내의 일부가 되어 버립니다. 따라서 여러 저택과 집들이 들어서고, 병원, 묘지, 정원 등이 생겨납니다. 거대한 떵쁠의 탑은 14세기 말에 잠시 감옥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16-17세기에는 군대의 무기고로 쓰이기도 하였으며, 이후에는 문서보관소로 사용되었습니다. 16세기 말에는 원래 있던 50 미터 높이의 떵쁠의 탑 (Grande Tour) 앞에 그 절반 정도 높이의 작은 탑 (Petite Tour) 을 덧붙여 세워, 문서보관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살기도 했습니다. 17세기에는 베르싸이으를 건축한 아르두앙-멍싸르 (Jules Hardouin-Mansart) 가 오삐딸회의 대원장을 위한 궁전 (Palais du Grand Prieur) 을 세웠으며, 이 건물은 18세기에 아르뜨와 백작 (comte d'Artois), 즉 루이 16세의 동생이자 훗날의 샤를 10세의 소유가 됩니다.

18세기의 떵쁠 탑을 묘사한 그림

비록 중세의 두껍고 투박하고 순전히 군사적인 보호를 목적으로 하던 성벽은 사라졌지만, 떵쁠은 여전히 보다 낮고 보다 얇은 벽으로 둘러쌓인 동네였습니다. 이 동네로 드나들기 위해서는 딱 하나의 문 밖에는 없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꼬뮌 드 빠리는 왕정이 무너진 후 왕가를 떵쁠에 가두기로 했던 것입니다. 즉 통제를 하기가 쉬웠던 것이지요. 처음에는 왕가를 떵쁠로 이송한다고 했을 때, 그래도 프랑쓰의 왕실인데, 모두들 대원장의 궁에 머물게 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꼬뮌 드 빠리는 작은 탑을 왕실의 거처로 정했습니다. 그나마도 큰 탑이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건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수리하는 동안만이었습니다. 따라서 작은 탑에서는 약 한 달 여간, 그리고 큰 탑으로 옮겨가서는 식구별로 최소 4개월에서 최대 3년 넘게까지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우선 루이 16세가 떵쁠을 가장 먼저 떠나긴 했지만, 이것은 1793년 1월 21일 기요띤에 목이 잘리기 위함이었지요. 다음으로 마리-엉뜨와넷이 1793년 8월에 꽁씨에르쥬리 (Conciergerie) 로 이감됩니다. 1794년 5월에는 루이 16세의 여동생 엘리자벳 (Élisabeth) 공주가 역시 기요띤 형을 당하고, 1795년 6월에는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살던 루이 16세의 어린 아들이 결핵으로 죽습니다. 유일한 생존자는 루이 16세의 첫째 딸 마리-떼레즈 (Marie-Thérèse) 로, 그녀는 1795년 12월 외스터라이히 제국에 잡혀 있던 네 명의 프랑쓰 포로와 교환됩니다. 

이후 세월이 바뀌면서 왕정주의자들이 떵쁠의 탑을 마치 순례지처럼 찾아오는 일이 잦아지자, 황제가 된 나뽈레옹이 1808년 탑을 제거하게 합니다. 지금은 탑이 있던 자리를 표시해 주는 흔적 만이 길 위에 그려져 있습니다.

탑이 있던 자리의 한 쪽 모퉁이를 표시해 주는 3구 구청 앞의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