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di 17 janvier 2011

떵쁠리에 (Templiers)

떵쁠리에들은 12세기부터 14세기까지 활동했던 기사 (chevalier) 이자 수사 (moine) 였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1차 십자군 전쟁의 성공으로, 유럽인들은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고, 그동안 금지되었던 성지 순례가 다시 가능하게 되기는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험은 도처에서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1118년, 위그 드 빵 (Hugues de Payns) 이라는 기사가 다른 여덟 명의 동료를 모아 « 그리스도의 작은 기사들 » (Pauvres chevaliers du Christ) 이라는 조직을 만듭니다. 이들은 유럽에서부터 도착하는 순례자들을 항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안전하게 경호하는 역할을 했고, 이것은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아, 예루살렘의 왕 보두앙 2세 (Baudouin II de Jérusalem) 는 자기가 살던 궁의 일부를 이 가난한 기사들에게 내어줍니다. 보두앙 2세가 살던 궁전은 그 옛날 (기원전 10세기) 쌀로몽 왕이 지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자리에 있었기에, 성전 즉 Temple 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하여 1119년부터 이들은 « 떵쁠의 기사 (chevaliers du Temple) » 또는 « 떵쁠리에 (Templiers) » 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떵쁠리에들의 특징은 기사이면서 동시에 수사와 같은 삶을 살려고 한 데 있습니다. 창립된 지 꼭 십년 째 되던 해에 (1128), 이미 그 수가 매우 불어난 이 군사-종교적 조직은 트르와 공의회 (Concile de Troyes) 에서 교황으로부터 정식으로 수도회 인가를 받고, 고유한 규칙과 의상 등을 정합니다. 이후로 점점 더 번성한 떵쁠회 (Ordre du Temple) 는 예루살렘 왕국과 그 주변은 물론 유럽 각국에도 수많은 분원을 세웠습니다. 프랑쓰에만 삼천여 개에 이르렀다고 하지요. 빠리의 떵쁠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수도원 외에도 이들은 성과 군사적 요새들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떵쁠회는 군사적 조직이긴 했지만, 군인이라고 해서 모두 다 싸움만 할 수는 없는 것처럼, 떵쁠리에들 중에서도 일부 만이 말을 타고 칼과 창을 쓰는 기사였고, 다른 많은 떵쁠리에들은 수도원이 운영될 수 있도록 여러가지 다른 업무를 맡아 생활했습니다. 특히 씨또회 (Ordre de Cîteaux) 의 영향을 많이 받은 떵쁠회는 직접 농경지를 가꾸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는 일을 주요 임무로 생각했습니다. 떵쁠리에들의 이러한 검소한 모습과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는 용감한 모습, 그리고 순례자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희생적인 모습 등이 복합되어, 떵쁠리에들은 많은 인기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떵쁠리에들은 놀랍게도 은행가의 역할도 했습니다. 어찌 보면 오늘날의 어음이나 수표 등을 발명한 사람이 떵쁠리에들인 셈인데, 멀리 바다 건너 예루살렘까지 순례를 떠나는 사람들이 몇 년에 걸치는 여행 기간 동안 현금을 들고 다니기가 겁이 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럽에 있는 떵쁠 아무 곳이나 찾아가 자신들의 경비를 맡겼고, 대신 그것을 증명해 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후 빨레스띤에 도착한 다음 또다시 아무 떵쁠이나 찾아가 그 증서를 내밀면 그에 해당하는 현금을 내어 주었습니다. 이 씨스템은 반드시 유럽과 빨레스띤 사이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같은 지역 내에서도 활용되었으며, 또한 자신들의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도 용감한 군인인 동시에 검소한 떵쁠리에들에게 돈이나 보석, 보물을 맡기고 관리해 주기를 청했습니다. 심지어 프랑쓰의 왕도 자신의 개인 재산을 떵쁠리에들에게 맡겼으며, 여러 지방에서 거두는 세금 따위가 모두 빠리의 떵쁠에 도착하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국세청과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이 모든 것이 떵쁠리에들의 돈이 아니었지만, 점차로 사람들 사이에서는 떵쁠리에들이 본연의 모습을 버리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것처럼 보여졌습니다. 더군다나 수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 끝에 결국은 유럽인들이 1291년 빨레스띤에서 철수하고 나서는, 더이상 떵쁠리에들은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순례자를 보호한다는 원래 의무가 없어졌으니까요. 따라서 한때 많은 인기를 누리고 존경을 받았던 떵쁠리에들이 점점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307년 10월 13일, 프랑쓰 전국의 모든 떵쁠리에들이 일제히 왕명으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떵쁠리에들을 갑자기 체포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전국의 모든 떵쁠리에들을 동시에 체포했다는 것은, 이 사건이 매우 치밀하게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온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이 체포를 명한 필립 4세 르 벨 (Philippe IV le Bel) 은 부족한 국고를 채우기 위해서, 떵쁠리에들이 축적한 것으로 믿어지는 어마어마한 부를 빼앗을 생각이었습니다. 게다가 떵쁠리에들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도 부정적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치밀한 준비 끝에 이러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 때 교황으로 선출된 지 얼마 안 된 끌레멍 5세 (Clément V) 가 교회의 수사들을 함부로 잡아 들인 것에 대해 어느 정도 형식적인 반감을 표했지만, 끌레멍 5세도 사실은 애초에 프랑쓰 왕권의 힘으로 교황의 자리에 올랐던 사람입니다. 그는 보르도의 주교였고, 처음으로 로마에 가기를 거부하고 아비뇽 (Avignon) 에 머문, 프랑쓰 출신의 교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문에 못이긴 떵쁠리에들이 스스로 죄를 고백하는 바람에 교황도 명목을 잃었습니다. 고문 끝에 자백한 떵쁠리에들의 죄상은 그리스도 모독, 우상 숭배, 성물과 성직 매매, 음란한 비밀 의식, 동성애, 등등 이루 말도 안되는 것들이었으며,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필립 르 벨과 그의 측근들은 이것을 합법적으로 통과시키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결국 7여년에 걸친 재판 끝에 떵쁠회는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떵쁠회의 마지막 수장 쟉 드 몰레 (Jacques de Molay) 는 이단자의 선고를 받아 1314년 3월 18일 노트르 담 (Notre Dame)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집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떵쁠리에들을 화형시키거나 고문 끝에 죽였지만, 필립 4세는 결국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떵쁠의 재산은 위에서 말했듯 그들의 개인 소유물이 아니라 위탁된 것이었으며, 떵쁠 고유의 재산은 떵쁠회가 해체된 후 오삐딸회 (Ordre de l'Hôpital) 를 비롯한 다른 수도원들에서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떵쁠의 진짜 보물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고 믿는 전설이 생겨나 지금까지도 소설이나 영화, 놀이의 주제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역시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떵쁠리에들이 실제로 은밀한 의식을 행하던 비밀 종교 조직이었으리라는 낭만적인 상상과, 쟉 드 몰레가 죽으면서 퍼부었다는 저주가 모두 들어맞으면서 떵쁠리에들은 일종의 신화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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